우리민족은 돼지를 특별한 동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다산을 상징하는 복스러운 돼지로 부(富)를 염원하였던 것 같죠. 가정에서 돼지그림에 ‘가화만사성’이라는 문구를 넣은 액자를 벽에 걸어 놓았던 것, 몇 푼이나마 동전으로 재산을 모으는 저금통에 돼지 이미지가 사용된 것을 볼 수 있으니까요.
돼지꿈을 꾸면 복권을 살만큼 돼지는 돈이 따른다는 것이지요. 어렸을 적부터 흔히 볼 수 있었던 문방구 앞에 쌓아 놓은 빨간색 플라스틱 돼지저금통.
요즘도 여전히 문방구 앞을 지나노라면 돼지저금통이 걸려있고, 쌓여 있답니다. 지난날보다 모양새도, 재질도, 품질도 좋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동전을 모으는 돼지저금통임에는 틀림없네요.
갈수록 동전의 역할이 줄어드는 요즘 저금통이 인기상품일 리 만무하지만 여전히 집안 한 곳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데는 뭔가 이유가 있을 법 합니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에 힘입어 한 푼 한 푼 모으는 저축 습관이 미덕이 되면서 저축을 장려하던 그 시절엔 돼지저금통을 받아 들고 1원, 5원, 10원, 100원 등 꿈에 부풀어 ‘쨍그랑 한 푼’으로 돼지저금통의 배를 불리기 위해 동전을 모으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배가 가득 찬 돼지저금통을 가슴에 껴안고 기뻐했던 그 기억은 모든 사람들이 함께 느꼈던 추억이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요즘은 동전 제작단가가 높아지자 돼지저금통이 동전 유통을 가로막는 주범으로 몰렸고 동전이 가득한 돼지저금통은 은행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지요. 그렇다 할지라도 돼지저금통은 대박의 욕망으로 가득한 사람들에게 정직하게 돈을 모으던 초심을 떠올리게 해주는 존재라는 점에서 더 애착이 갑니다.
오늘은 이런 돼지저금통의 유래를 알아봅니다.
미국 캔자스 주의 작은 마을에 채프먼 부부가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 부부에게는 윌버라는 이름의 아들이 있었는데, 어느 날 탄넬이라는 사람에게 용돈을 받게 되었습니다. 윌버는 받은 용돈을 어떻게 쓸까 고민하다 탄넬씨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지요.
“저희 마을에는 한센병(나병, 문둥병이라고도 함) 환자들이 많아요. 저는 아저씨가 준 3달러로 새끼 돼지를 사서 키우려고 해요. 그리고 이 돼지가 크면 팔아서 한센병 환자 가족들을 도울 거예요.”
윌버는 열심히 새끼 돼지 페트를 키웠고, 어느새 마을의 꼬마들도 관심을 나타내며 윌버와 함께 돼지를 키워 나갔습니다.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윌버와 마을 꼬마들에 의해 새끼돼지 페트는 살이 포동포동 올랐습니다.
이듬해 윌버는 페트를 팔아 편지에 쓴 대로 한센병 환자 가족을 도와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이 어느 한 신문에 소개가 되면서 그 기사를 읽은 많은 사람들이 돼지 저금통을 만들어 이웃을 돕기 시작했답니다. 최초의 돼지 저금통이 탄생한 것이지요.
그때부터, 소년들은 용돈을 아끼고 군것질할 돈을 아껴서 저금통에 넣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모아진 돈으로 한센병 환자의 구제에 사용했습니다. 한 소년의 작은 사랑이 번져 최초의 돼지 저금통을 만든 것이랍니다.
[저금통의 역사]
저금통의 역사를 보면 현재 알려진 가장 오래된 저금통은 약 2,300년 전에 만들어진 고대 그리스 신전모양의 토기이나 실제 저금통이 본격적으로 2,100년 전에 전파된 로마시대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동양의 경우에는 약 2,100년 전에 만들어진 저금통이 발굴되었다고 합니다.
초기의 저금통은 대개 토기였으며 예술적인 장식성보다 정신적인 염원이 담긴 주술적 형태를 띤 것으로 여성의 가슴이나 홀쭉한 곡선으로 이루어진 형태였습니다. 18세기 이후부터 예술작품으로서의 다양한 형태의 저금통이 여러 재질로 제작되었고 우리나라에는 주로 목제 저금통이 제작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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