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관광

경복궁과 국립민속박물관을 찾아서

아침햇쌀 2012. 6. 13. 10:27

오늘은 서울 나드리하는 날입니다. 서울 인근에 살면서도 실상 서울구경은 제대로 못하고 지내왔답니다.

그래도 서울하면 경복궁이 생각나죠. 조선시대의 궁궐을 보면서 역사공부도 하고  제대로 하루를 즐겨보기로 하였죠.

 

경복궁

경복궁은 이성계가 왕이 되면서 도읍을 옮기고 궁을 창건하였다고 합니다. 이 당시 궁의 규모는 390여 칸으로 그리 크지 않았다고 하네요.

 

세종은 이곳에 집현전을 두고 학문하는 신하들을 가까이에 두었으며 경회루 남쪽에 시각을 알리는 보루각을 세우고 궁서북 모퉁이에 천문관측 시설인 간의대를 마련하였으며 강녕전 서쪽에는 흠경각을 짓고 그 안에 시각과 사계절을 나타내는 옥루기를 설치하였다고 합니다.

 

임진왜란으로 인해 창덕궁 창경궁과 함께 모두 불에 탄 것을 1867년 홍선대원군이 다시 세웠다고 합니다. 그러나 1895년 궁궐 안에서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사건이 벌어지고 왕이 러시아 공관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주인을 잃은 빈 궁궐이 되었다고 하죠.

 

1910년 국권을 잃게 되자 일본인들은 건물을 헐고 근정전 앞에 총독부 청사를 짓는 등의 행동을 하여 궁의 옛 모습을 거의 잃게 되었었답니다. 비극의 역사였죠.

 

 

광화문

광화문은 경복궁의 정문입니다. 광화문은 조선의 법궁에 해당하는 궁궐의 정문으로 다른 궁궐들의 정문과는 달리 돌로 높은 석축을 쌓고 그 위에 중층구조의 누각을 세워서 마치 성곽의 성문과 같은 격식으로 장대하게 지어졌다고 하는군요.

 

광화문의 문루에는 종을 걸어두어 시각을 알리는데 사용하였다 하며 일제 강점기에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으면서 건춘문 북쪽으로 옮겼다가 한국전쟁 때 폭격을 맞아 문루가 모두 소실되었다고 합니다. 현재의 광화문은 2010년에 원래의 모습으로 제자리를 찾아서 복원한 것이라네요.

 

 

궁의 이름은 정도전이 '시경'에 나오는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만년 그대의 큰 복을 도우리라"에서 큰 복을 빈다는 뜻의 '경복(景福)'이라는 두 글자를 따서 지은 것이랍니다.

 

 

건물의 배치는 앞부분과 뒷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앞부분에는 정전과 편전들이 놓이고 뒷부분에는 침전과 후원이 자리 잡고 있어 이른바 전조후심의 격식을 갖추고 있습니다.

 

이것은 조선시대의 다른 궁궐들이 정전과 침전을 좌우에 놓거나 배치하고 있어 앞뒤의 관계가 불분명한 것과 대조를 이루는데 경복궁이 조선조의 정궁이므로 특히 엄격한 규범을 나타내고자 하였던 것으로 풀이되고 있습니다.

 

 

근정전

국보 제223호인 근정전은 경복궁의 정전입니다. 왕의 즉위나 신하들의 조회의식을 받거나 공식적인 대례 또는 외국 사신을 맞이하는 등 큰 행사는 근정전을 중심으로 이루워졌는데 이때 신하들은 마당에 놓여진 품계석에 따라 정해진 위치에 자리를 잡았다고 합니다. 

 

정전인 근정전은 궁궐 내에서도 가장 규모가 크고 격식을 갖춘 건물로 면적도 가장 넓게 차지하고 있습니다. 중층으로 된 근정전 건물은 2단의 높은 월대 위에 자리하고 있으며 전면에는 중요 행사를 치룰 수 있는 넓은 마당이 있고 그 둘레를 행각이 감싸고 있습니다.

 

 

중심 건물인 근정전은 '천하의 일은 부지런하면 잘 다스려진다'는 뜻이 담겨 있는 건물이며 국가와 왕을 표현하는 상징물이기도 하였던 것이었죠.

 

마당에는 돌을 얇고 네모나게 다듬은 박석이 깔려 있는데 표면을 약간 거칠게 마무리하여 단조롭지 않고 빛이 반사되어도 눈이 부시지 않도록 하는 세심한 배려가 엿보이기도 합니다. 이 마당에서는 노인들을 격려하는 기로연이나 과거시험도 치러졌다고 합니다.

 

 

경복궁에는 왕과 왕비의 침전 영역이 둘로 구분되어 있다고 합니다. 왕의 침전인 강녕전이고 다른 하나는 강녕전의 후면에 있는 양의문을 통하여 들어가는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이죠.

 

궁궐에서 침전은 왕과 왕비가 일상생활을 하는 곳으로 내외 종친을 불러 연회를 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정사와 관련한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아니었죠. 왕이 신하들을 불러 은밀히 정사를 논의하는 곳이기도 하였습니다.

경회루

경복궁의 또 다른 상징은 경회루 같습니다. 1412년 태종은 경복궁의 연못을 넓히고 섬 위에 지금과 같은 규모로 경회루를 만들었습니다. 이 곳에서 임금과 신하가 모여 잔치를 하거나 외국에서 오는 사신을 대접하도록 하였으며 연못을 크게 만들면서 파낸 흙으로 아미산이라는 동산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 후 성종 때 건물이 기울어져 다시 지었는데 돌기둥에 용과 꽃 장식을 하여 화려하게 치장하고 연산군 때에는 연못 안 인공섬에 만세산을 조성하고 그 곳에 월궁을 꾸며 조화를 장식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화재로 모두 소실되었답니다. 경회루 건물은 없어졌지만 경복궁이 중건될 때까지 연못은 나라에 가뭄이 들 때마다 기우제를 지내는 곳으로 이용되었다고 하죠.

 

 

현재의 경회루는 고종 4년(1867년)에 중건된 것입니다. 다시 지어진  경복궁의 많은 건물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소실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경회루는 중건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여 왔습니다.

경회루 앞에 있는 나무입니다. 용이 하늘로 나르듯 하네요.

 

 

향원정

고종이 건청궁을 지을 때 옛 후원인 서현정 일대를 새롭게 조성하였는데 연못 한가운데 인공의 섬을 만들고 그 위에 육각형 정자를 지어서 "향기가 멀리 퍼져 나간다"는 뜻으로 향원정(香遠亭)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향원지를 건너는 다리는 "향기에 취한다"는 뜻으로 취향교라 부릅니다. 이 곳을 우리나라 최초의 전기발생지라고도 합니다.

 

 

건청궁

건물이 방금 지은듯 새로워 보입니다. 건청궁은 원래 명성왕후가 거처하던 곳이었으나 1895년 일본이 을미사변을 일으켜 건청궁 안의 곤녕합에서 명성왕후를 시해하였답니다. 명성왕후의 시신은 옥호루에 잠시 안치되었다가 건청궁의 뒷산인 녹산에서 불태워 졌다고 하죠. 고종은 아관파천 후 건청궁으로 돌아가지 않았고 주인을 잃은 건청궁은 1909년 완전히 헐리게 되었습니다.

 

광복 후 건청궁 자리에는 국립민속박물관이 세워졌고 동쪽에 명성왕후가 난을 당한 곳이라는 뜻의 명성왕후조난지지라는 표석과 함께 당시의 참상을 그린 기록화가 전시되었다가 2007년 복원되어 일반에 공개된 곳이죠.


 

국립민속박물관

경복궁 동쪽으로 국립민속박물관이 있습니다. 입장료는 무료네요. 국립민속박물관은 한국인의 생활문화, 일상문화, 일생문화 등 3개의 상설 전시실과 야외전시장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제1전시실은 한민족 생활을 주제로 우리 민족의 원시생활과 삼국시대의 생활상, 백제 공예 공방과 신라 공예 공방에서의 작업 광경과 삼국의 왕과 왕비의 모습을 마네킹 등을 통해 볼 수 있도록 하였으며 고려시대의 청자와 인쇄, 조선의 한글 창제와 각종 과학 발명품 등을 전시하여 세계적인 문화 선진국으로서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제2전시실에서는 우리 조상의 생업과 의식주 생활, 수공에를 주제로 다양한 생활상을 볼 수 있었습니다. 또한 전통적인 주거 생활을 볼 수 있게 안방과 사랑방을 꾸미고 각 방에 가구 마네킹을 적절히 배치하여 당시의 주거 생활을 관찰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우리 고유의 상차림은 물론 김치의 재료와 종류 등 식생활도 다양하게 소개되어 있습니다.

 

 

제3전시실은 한국인의 일생이라는 주제로 한 생명이 태어나 삶을 마칠 때까지 거치게 되는 다양한 의례를 소개하고 있네요. 아기를 낳기 위한 기자에서 탄생과 성장, 사회생활,  놀이와 사회제도, 주술과 점복, 상례와 제사까지도 소개하고 있습니다.

 

 

경복궁 관람을 마치고 후문으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후문 전에 왼편 아래쪽에 조그만 건물이 있는데 지나가는 관광객이 저 곳이 12.12 역사의 산실이라고 하길래 내려다 보고 사진 한방 넣었습니다.

 

 

후문으로 나오니 와~ 이곳이 청와대네요. 덕분에 청와대도 와보고 서울나드리 참 잘했다 싶습니다.

돌담길을 돌아 가로수가 멋들어진 운치있는 청와대 앞길을 거닐 수 있는 행운이 따른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