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관광

충주 탄금대에서 신립장군의 전설도 알아보고

아침햇쌀 2012. 6. 5. 08:07

충주 탄금대

신라 진흥왕시대 가야국의 우륵이 가야국의 멸망을 예견하고 우거지를 찾아온 것이 충주였는데 이곳 대문산의 아름다운 풍치에 감동되어 제자 만덕에게 가무 음곡을 가르치며 가야금을 연주하니 그 미묘한 음악소리에 이끌려 모여든 사람들이 부근에 부락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이런 연유로 탄금대라 호칭하게 되었고 우리나라 국악의 발상지이기도 하죠. 

 

또한 임진왜란때 순변사 신립장군이 휘하 8,000여기를 이끌고 이곳에서 왜적의 무리를 맞아 사력을 다하여 전전분투하였으나 천추의 한을 품고 장열하게 최후를 마친 전적지이기도 하답니다.

 

이 지역은 구릉 상태를 이루어 산 전체가 펑퍼짐하여 경사가 거의 없고 탄금대는 속리산에서 발원한 탄천이 북쪽으로 흘러들어 남한강과 합류하는 지점의 언덕에 자리하고 있어 수려한 경치가 일품이네요.

 

 

 

이 곳은 수려한 경관으로 인해 충주시민들의 휴식 공원으로 조성 운영되고 있다는군요.

탄금대에는 신립의 충의심을 기리기 위한 탄금대비가 있습니다.

 

 

감자꽃 노래비

충주는 감자가 많이 생산되는지... 아니면 감자와의 인연이 깊은지...

감자꽃 노래비가 있습니다.

[자주꽃 핀건 자주감자. 파보나 마나 자주감자.

하얀꽃 핀건 하얀감자. 파보나 마나 하얀감자.]

 

 

충정공 신립장군

신립장군은 임진왜란 당시 빈약한 병력으로 충주의 달천을 뒤로 두고 배수진을 쳐서 적과 대결하였으나 패하여 탄금대에서 몰려오는 적들을 죽이고 강물에 투신 자살하였으며 훗날 조정에서 영의정을 추증하고 충장이란 시호를 내렸답니다.

 

내가 살고 있는 우리 이천시는 신립장군과 깊은 인연이 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들어왔던 기치미고개와 광주시 경계 넋고개에 대한 이야기인데 이 고개들은 신립장군과 연루된 재미있는 전설이 있습니다.

 

 

신립장군의 전설

신립장군이 충주 탐금대에서 왜군에게 당할 길이 없어 참패하고 신립과 김여물은 적병 수십 명을 죽이고 탄금대에서 몸을 던져 물에 빠져 죽고 말았는데 부하들이 시체를 건져 서울로 오는 도중 '장군님' 하고 부르면 관속에서 '오야'하는 대답 소리가 났다고 합니다.

 

이천시를 지나 기치미 고개에 이르러 또 '장군님'하고 부르니까 대답 대신 '에헴'하는 기침소리가 나서 이 고개를 기치미고개라 부리게 되었고. 다음 고개에 이르러 '장군님'하고 부르니 그때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아 신립장군의 넋이 나갔다고 해서 넋고개라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관을 메고 가다가 잠시 쉬었는데 관이 땅에 달라붙어 움직이지 않아 그 자리에 묘를 썼다고 합니다. 

그곳은 현재 신립장군의 묘가 있는 광주시 곤지암읍 신대리라 합니다.

  

이 비는 탄금대기입니다.

 

 

탄금대 정상 탄금정입니다.

 

 

탄금정에 오르니 탄천주변의 풍치를 볼 수있네요.

 

 

탄금정 아래 열두대인데 오르내리는 길을 계단식으로 설치하는 공사가 진행 중입니다.

 

 

우륵선생 추모비

우륵은 신라 진흥왕 때 활약하던 악사로 유명하죠. 원래 가야국의 사람으로 가야금을 만들고 12곡을 지었으며 그 뒤 가야국이 어려워 지자 신라에 귀화하여 왕의 배려로 충주(국원)에 편안히 머물게 하였는데 우륵은 계고, 법지, 만덕 세사람에게 재능에 따라 계고에게는 가야금, 법지에게는 노래, 만덕에게는 춤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이때 우륵이 지은 가야금곡이 궁중악으로 되었다고 하네요. 

 

 

탄금대 안에 있는 야외무대입니다. 파란 잔디 위에 넓은 공연장이 아주 훌륭해 보입니다.

 

 

중원고구려비

이 비는 국보 제205호로 지정된 것으로 충주시 가금면 용전리에 위치해 있는데 이곳에는 모형도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신라 장수왕(423년)때 만들어 졌다고 하는데 고구려 광개토대왕비 발견 이후로 가장 큰 고구려비 라는 점과 당시 신라와의 관계 연구에 중요한 비석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