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관광

21세기 관요(官窯), 청파요

아침햇쌀 2015. 2. 27. 08:50

[이천농촌체험관광 스토리 열셋. 청파요 이영주]

 

관요(官窯)는 역사적으로 시대마다 있어 왔다. 고려시대 관요에서는 중국의 송나라 영향을 받아 청자를 주로 만들었다. 고려시대에서 조선으로 넘어 오면서 지배세력이 바뀌었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새로운 흐름이 생겨나게 된다. 도자문화도 시대의 흐름과 맥을 같이 한다. 고려시대에는 귀족적, 불교적인 색채가 강한 청자를 필요로 하다가, 조선시대에는 유교적인 선비사상이 가미된 보다 단아한 느낌의 도자기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이에 도공들은 중국에도 없었던 분청사기(粉靑沙器)를 창조하게 된다. 그동안 우리나라의 문화는 대부분 중국에서 전해졌는데, 도자기도 마찬가지로 중국의 청자가 전래되어 고려시대의 상감청자로 발전되었고, 백자도 마찬가지로 중국에서 전해져 우리 감성이 담긴 달항아리 백자로 발전시켰다. 그러나 분청사기는 중국의 영향을 받지 않고, 우리나라에서 자생된 유일한 우리만의 전통도자기라 할 수 있다.


 

 

고려상감청자 조선분청사기 조선초기 분청사기는 왕실에서 사용한 식기, 외국사신에게 하사하는 선물, 공이 있는 신하에게 준 하사품, 왕릉의 부장품 등으로 쓰였다. 조선중기 이후에 경기도 광주일대에 분원이 설치되어 관요로써 백자를 주로 만들어 이러한 역할을 하였다. 조선 말기를 기점으로 관요가 없어졌고,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가마가 파괴되고 도자기 제작자들이 없어지면서 우리나라의 도자기 문화의 맥이 끊기게 된다. 한국전쟁 후 1960년대에 들어서며 일본자본과 일본에서 필요로 하는 도자기 그릇의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우리나라에 초기 형태의 도자기공장이 들어선다.


 

 

1963년 처음 도자기 작업을 시작할 때에는 도자기 만드는 자료들이 없어서 파편을 보고 실험을 통해 그에 맞는 도자기 흙, 상감, 유약 등을 찾는 노력을 끊임없이 하였다.

 

 

고려청자를 재현하고, 백자의 담백한 색을 찾는 노력을 하던 중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분청사기(粉靑沙器)를 보게 됐다. 담백하면서 자유분방한 표현, 또 중국의 영향을 받지 않고, 오롯이 우리나라만의 도자기라는 매력에 분청사기 작업을 시작하였다. 당시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고려청자의 재현에 매달리고 분청사기 작업을 하는 작가는 거의 없었다.

 

 

분청사기는 작업하고 연구하면 할수록 빠져드는 매력이 있었다. 틀과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 분방한 표현이 나를 사로잡았다. 때로는 가마에 장작을 때는 작업이 잘못되어 몇 달을 공들여 만든 작품들을 전부 깨버린 적도 많았다 그러나 이러한 실패가 나를 더욱 더 단단하게 하였고, 새로운 작업을 할 수 있는 영감을 주었던 것 같다.

 

 

50여년을 분청사기의 매력에 빠져 작업하면서 항상 전통에 기본을 둔 새로운 작업을 하려고 노력하였고, 이러한 노력들이 결실이 되어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의 해외순방 의전선물로 청파요의 분청사기 작품이 선정되어 세계 각국의 정상들에게 선물로 전해져 우리 도자 문화를 알리는 역할을 해오고 있다.

 

 

청자와 백자는 엄밀히 말하자면 뿌리는 중국에 있다. 그러나 분청사기는 우리나라에서 자생된 우리나라의 도자기이다. 그래서 대통령의 의전 선물로서 그 의미와 당위성이 있는 것이다.조선 시대에는 광주의 분원(分院)이 관요(官窯)의 역할을 했다면 이제는 이천의 청파요(靑坡窯)가 관요(官窯)의 역할을 이어가며 우리 도자기를 세계 각국에 알리고 있다.

 

 

그러나 청파요는 한 발 더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 이제 관요(官窯)의 역할뿐 아니라 민요(民窯)의 역할도 함께 하고자 한다. 우리 사회는 왕이 집권하는 시대에서 국민이 주권을 갖는 민주주의의 시대로 바뀌었다. 조선 시대의 전통을 간직하는 동시에 현재 대한민국의 주인인 국민들이 자손 대대로 사랑하고 즐길 수 있는 자기를 만드는 것. 이 또한, 민주주의 시대의 진정한 관요의 모습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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