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관광

도립이천산수유 화수분이야기

아침햇쌀 2015. 2. 13. 08:18

[이천농촌체험관광 스토리 둘. 산수유 낭자 이미순]

 

1. 엄마의 화수분, 산수유
여러분, 여러분의 부모님이 애지중지 하시며 아끼는 물건은 무엇이 있나요? 여러분이 현재 제일 소중하게 생각하는 보물이라고 한다면, 무엇을 떠올리시나요? 저의 집에는 엄마가 아끼던 시계와 뒤주가 남아 있습니다. 저는 엄마가 남겨주신 시계와 뒤주를 보며, 어릴 적 엄마를 추억하고 그리워 합니다. 지금 이렇게 행복을 누리는 것은 모두 엄마가 남겨주신 삶의 터전 덕분이지요.

 

 

그 옛날 그 시절 누구나 그랬겠지만, 울 엄마도 아버지 집안이 돈 많은 부자라는 말에 속아 시집을 왔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집안은 아무것도 없는 가난한 집이었습니다. 양반이라는 허울에 남의 땅에 집만 덩그러니... 엄마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자면 “숫가락 몽셍이 하나 제대로 없는 집안에, 시누이에 시동생까지 줄줄인데 있기는 개코나 뭐가 있어!” 입니다.


시집 온 첫 날이 엄마의 고생의 시작이었고, 아파도 아프다는 내색도 못하고 일만하며 살았습니다. 그 탓에 엄마는 슬하의 열 자식 중 넷이나 잃었답니다. 낭랑 18세라는 꽃다운 나이에 시집을 오시어 저를 마흔에 낳았으니, 22년 동안 열을 낳은 것인데 그 인생이 얼마나 고단하고 험난했을지 마음이 아려옵니다.


엄마는 임신하고도 봄부터 늦가을까지 밭에서 남의 일을 해야 했습니다. 겨울엔 산수유 이삭을 줍느라 고생, 그것도 모자라 밤엔 가마니를 짜고 멍석을 짜느라 사계절 내내 쉴틈이 없었답니다. 제대로 쉬지도, 먹지도 못해 죽은 아이를 낳은 적도 있고, 아이를 낳고 삼칠일도 지나지 않아 일을 해야 해서 산후 조리도 제대로 한 적이 없습니다. 가슴에 슬픔과 아픔, 한을 품고 살면서도 아무런 내색 없이 일만하며 사신 엄마가, 그래도 위안을 받은 건 조금씩 늘어가는 땅과 집안 살림이었습니다.

 

 

재산이 하나도 없던 집이라, 겨울이면 산수유나무도 없어 이삭을 주워 돈을 모았습니다. 말이 쉬워 산수유 이삭을 줍는 거지 이삭을 줍는 건 보통 일이 아닙니다. 저도 엄마를 따라 아버지가 손수 새끼를 꼬아 만든 종달이를 들고 산수유 이삭을 주운 적이 있었습니다. 제게 지금 그 일을 또 하라면, 억만금의 돈을 준대도 엄두가 나질 않습니다. 그 때는 장갑이 흔하질 않았고, 대바늘로 뜬 장갑은 이삭을 줍는데 불편하여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땐 왜 그리 추웠는지... 문고리만 잡아도 손이 쩍쩍 달라붙었으니... 상상이 되시나요?

 

그래서 추운 겨울에 시린 손을 호호 불면서 산수유를 주워야 했고, 그래도 추우면 모닥불을 한쪽에 피워 놓고 언 손을 녹이며 이삭을 주웠습니다. 이삭을 줍다보면 산수유나무 아래나 굵은 가지사이로 어쩌다가 산수유가 한줌 모여 있는 곳이 있는데, 그 걸 발견한 심정은 아마도 산에서 심마니가 산삼을 만난 것과 같다고 해도 될 것입니다. 그땐 추위에 주우러 나온 보람이 생기고, 얼굴에 함박웃음이 저절로 생겨 떠날 줄을 모릅니다. 이것이 시골 아낙네의 순박한 마음, 소박한 행복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산수유 한 알 크기는 얼마나 작은지... 하루 종일 이삭 주워야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래도 여벌로 돈이 생긴다는 기쁨에 겨울이면 추위 속에서도 추운 줄 모르고 열심히 이삭을 주웠습니다. 그 산수유 이삭을 팔아 한 해는 뒤주를 사서 쌀을 채우며 너무 좋아 하셨고, 한 해는 시계를 장만해 벽에 걸며 흡족해 하시던 엄마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한 해는 산수유를 팔아 돼지를 사고, 한해는 소를 사고, 새끼를 낳아 키워 밭을 사고, 논을 사고, 산도 사고...엄마는 말없이 그렇게 가난한 집안을 조금씩 조금씩 일으켜 세웠습니다. 산수유는 엄마의 화수분이었습니다.


사람은 죽을 때가 되면 주마등처럼 과거의 일들이 지나가는 가 봅니다. 병원에 입원한지 삼일 째가 되는 어느 날 엄마가 앉아서 무엇인가 손으로 자꾸 줍는 시늉을 하셨는데, 가만히 지켜보니 산수유 이삭줍던 행동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음엔 윗집 할머니 집에서 일하던 행동을 하며 자꾸 돌아가신 분이 앞에 보인다고 하셨습니다. 다음날 잠자리에 든 엄마는 깨어나지 못하고 유언도 없이 영원한 이별을 하고 가셨습니다. “그동안 너무 고생 하셨습니다, 사랑합니다. 엄마의 딸로 태어나게 해 주어 고맙습니다.” 라는 말도 전하지 못했는데... 그래서 더욱 엄마의 모습이 그립고 보고 싶습니다.

 

 

2. 마음의 화수분, 이춘재 느티나무
가장 오래 사는 나무는 어떤 나무가 있을까요? 저는 느티나무와 산수유나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마을에 500년 전 남당 엄용순 선생이 우의를 다지고, 효를 실천하기 위해 심은 느티나무와 산수유나무가 아직까지 살아있는 걸 보면, 제가 아는 나무 중 제일 오래 사는 나무 같습니다. 어릴 적 보았을 때나 50년이 된 지금도 나무는 그대로 변한 게 하나도 없습니다. 어릴 때만 해도 놀이터가 없었기에 느티나무에 그네를 매어 놀던 기억이 납니다. 여름에 그네를 타면 솔솔 스쳐가는 바람이 얼마나 시원하던지... 나무에 올라가 놀고, 나무 밑에 멍석 깔고 앉아 두런두런 수다 떨던 기억... 그땐 정말 놀이터가 나무였던 것 같습니다.

 

산수유나무는 정말 튼튼해서 가느다란 나무에 올라가도 부러지지 않고, 물기가 많아서 나무 밑이 시원해 여름엔 우리들의 놀이터가 됩니다. 어쩌다 가지가 일직선으로 크다가 Y자로 갈라져 크는데, 이것을 깎아 새총을 만들고, 자치기와 솟대, 그리고 장대와 부지깽이도 만들었습니다. 참 쓰임새도 많고 버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밭 언저리에 산수유나무를 심어, 밭은 밭대로 농사를 지어 먹고, 산수유는 산수유대로 수확을 해 겨울 농사를 지었으니, 선인들의 삶의 지혜에 감탄할 뿐입니다.


저희 동네는 참 행복한 복 받은 마을입니다. 그런 저희 동네에 제가 자랑하고 싶은 느티나무가 하나 있습니다. 50살 정도 된 나무입니다. 저는 이
나무를 ‘이춘재 느티나무’라고 부릅니다. 제 아버지가 심은 나무이기 때문입니다. 50년 전에 회관 앞에 버드나무가 한 그루 있었습니다. 정말 오랜 고목인데, 그 나무 아래서 우린 자치기도 하고, 숨박꼭질도 하고, 고무줄놀이도 하고, 말뚝박기도 하고, 말치기도 하고... 해가 지는 것도 모
르고 엄마가 부지깽이 들고 쫓아 올 때까지 정신없이 놀던 때가 생각납니다.


어릴 적 제 별명은 무엇이었을까요? 한번 맞춰보실래요? 고목인 버드나무 둥치는 늘 동네 할아버지 차지였습니다. 날 좋을 때면 할아버지는 늘 나오시어 버드나무 둥치에 앉아 계셨어요. 어린것들이 노는 모습, 커가는 모습을 보며 외로움도 달래고, 때론 세월의 무상함도 느끼며 노년의 심심함도 달랬을겁니다. 아주 가끔은 이야기도 하시며 잔소리도 하셨지요. 생각해 보니 그 연세의 할아버지가 없어 쓸쓸해서 그러셨나 싶습니다.


할아버진 심심하시면 저를 불러 놓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셨는데, 가장 많이 기억나는 것은 저를 보며 “미꾸라지 왔냐!” 하시는 거였습니다. 전 정말 그 별명이 싫었고, 그 때문에 할아버지까지 싫어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땐 제가 삐쩍 마르고, 얼굴도 길어 그렇게 놀렸던 것 같습니다. 어느날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버드나무도 따라 죽었습니다.


회관 앞이 썰렁해졌습니다. 왠지 이제 회관 마당에서 놀 맛도 사라졌습니다. 텔레비전이 나오면서 아이들이 뛰어 놀던 모습도 아주 멀어져 갔습니다. 그런데 그 버드나무를 대신해 조그만 느티나무가 자라고 있었습니다. 제 기억에는 없지만, 저희 아버지가 느티나무를 심었다고 동네 어르신이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아버진 왜 하고 많은 나무 중에 느티나무를 심었을까요? 제가 어릴 때 심었던 나무가 어느 새 자라 넓은 그늘을 만들어 주었고, 그 옆에 정자도 지어졌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나무그늘 정자에 앉아 화투도 하고, 참도 만들어 먹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도 하고, 정을 나누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아버지 이춘재가 만들어준 따뜻하고 즐거움이 끊이지 않는, 정이 오가는 마을주민의 공간입니다. 아버지가 남겨준 마음의 화수분 덕분입니다. 이제 느티나무에 아버지의 이름을 붙여 아버지의 뜻을 전하려고 합니다.


아버지와 엄마가 떠난 자리, 이제 엄마와 아버지의 화수분을 제가 간직하고 전파하려고 합니다. 부모님의 화수분인 산수유와 느티나무를, 산수유 마을에 오시는 모든 분들의 마음에 전하며 간직하도록 하겠습니다. “엄마! 아버지! 두 분 덕분에 지금 너무 행복합니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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