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여행

베수비오 화산폭발의 고대유적지 폼페이

아침햇쌀 2013. 4. 1. 20:25

서유럽여행 9일차. 오늘은 화산 폭발로 도시 전체가 사라졌다가 19세기에 발굴된 폼페이 유적지를 둘러 봅니다. 폼페이는 베수비오 산 남동쪽의 항구 도시로 고대시대 로마 귀족들의 휴양지로 사랑받던 도시였답니다. 그런데 서기 79년에 일어난 베수비오 산의 엄청난 화산 폭발로 한 순간에 화산재에 묻혀 사라져 버린 곳이라네요.

 

멸망한 폼페이의 유적이 19세기에 발견되었는데 현지인들은 폼페이 유적을 스카비라고 부르기도 한답니다. 가서 보니 큰 도시에 상상 못할 정도로 수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순식간에 앗아간 비극적인 곳이라는 것이 실감 남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2,000년 전 고대 로마시대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는 놀라운 역사의 현장이자 과거의 로마 사람들의 삶을 알려주는 소중한 문화유산이었답니다.

 

 

폼페이의 화산 폭발에 관한 기록은 훗날 플리니우스의 조카 플리니우스 2세가 역사학자 타키투스에게 보낸 2통의 편지에 의해 알려지게 되었다고 하네요.

 

화산이 폭발하기 며칠 전부터 베수비오 산은 이미 대재앙을 예견한 듯 사람들을 향하여 신호를 보내고 있었답니다. 재앙을 느낀 시민들은 몸을 피해 다른 도시로 향했고, 한편에서는 불의 신 불카누스의 노여움을 풀어 주기 위하여 성대한 제사를 올리기도 하였답니다. 하지만 신 불카누스는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분노를 표출하기 시작하였다네요.

 

 

서기 79년 8월 24일. 베수비오 산에는 이른 아침부터 역삼각형 모양의 거대한 구름이 생겨나기 시작했답니다. 구름이 커지면서 폼페이와 헤르쿨 라네움, 오프론티스 지역은 물론이고 캄파니아 해변을 따라 자리한 항구 도시 미세눔과 나폴리 지역까지 땅이 흔들리고 구름 띠가 퍼졌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불안감에 휩싸여 마음을 조이고 있었다네요

 

 

미세눔에 살던 로마 지중해 함대 사령관 플리니우스는 화산 활동을 보다 가까이에서 관찰하기 위하여 조카에게 폼페이로 가자고 제의했는데 조카인 플리니우스 2세는 학업 때문에 삼촌을 따라 나설 수 없었다네요. 플리니우스는 노예와 부하와 함께 작은 배를 타고 사람들이 빠져 나오고 있는 폼페이로 들어 갔답니다.

 

플리니우스가 폼페이 항구에 도착하기도 전에 베수비오 산은 화산이 폭발하여 먼지와 크고 작은 암석, 그리고 엄청나게 많은 용암을 토해 내고 있었다고 합니다. 죽음을 각오한 플리니오스는 폼페이로 향했고, 결국 유독 가스에 목숨을 잃고 말았답니다. 분진은 끊임없이 분출되어 결국 도시 전체를 덮어 버렸고 고대 로마의 아름다운 휴양지 폼페이는 이렇게 긴 잠으로 빠져 들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폼페이의 시가지 모습들입니다. 양 옆으로 사치품을 팔던 상점이 들어서 있던 건물들이랍니다. 그런데 이 도로를 보면 도로가 양 옆으로 있고 가운데 아래로 도로가 또 있지요. 양 옆 도로는 귀족들이 다녔던 도로이고, 가운데 도로는 노예들이 다녔던 도로라고 합니다.

 

 

징검다리가 있네요. 이 징검다리 용도는 무었일까? 이 돌다리는 귀족들이 노예가 다니는 길을 밟지 않고 건너기 위해 설치해 놓은 징검다리라 합니다. 이렇듯 귀족과 노예의 삶은 하늘과 땅과 같이 신분 구별을 철저히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네요.

 

 

이날의 비극적인 사건으로 폼페이는 2,000여 년 동안 화산재와 용암에 묻혀 있었다는 것. 그러다가 1748년 발굴이 시작되면서 폼페이는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는데 폼페이 발굴 작업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하루하루를 탄성으로 보내야 했답니다.

 

건물의 지붕과 벽은 엄청난 화산재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지만 나머지 부분은 화산 폭발 당시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폼페이가 옛 모습을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은 화산이 폭발하는 과정에서 1m부터 7m까지 엄청난 두께로 쌓인 화산재 덕분이었다고 합니다.

 

 

폼페이에서 가장 큰 도로인 델라본단차 거리는 많은 여인숙과 술집들이 있던 곳이랍니다. 로마가 멸망하게 된 이유 가운데 하나가 너무 호화로운 삶과 쾌락을 추구했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델라본단차 거리는 당시 로마인들이 얼마나 방탕한 생활을 했는지를 잘 보여 주는 곳이랍니다.

 

 

 

발굴작업이 진행되면서 놀라운 사실들은 화산 폭발 당시 폼페이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 사람들의 모습이 그대로 화석으로 남아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화산이 폭발하면서 날아온 돌과 용암, 화산재, 유독가스 등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 적어도 2,000명은 된다고 하네요.

 

 

대중목욕탕 자리입니다. 불을 지펴 물을 데웠고 많은 사람들이 한번에 목욕을 즐길 수 있도록 설치된 것이었다는데 아주 정교하고 과학적으로 설치되었습니다.

 

 

여기는 빵집이랍니다. 맷돌을 돌려 밀을 빻아 밀가루를 화덕에 구워 빵을 만들어 폼페이 시민을 먹여 살렸던 곳이라고 하네요.

 

 

공동 우물터 수돗가입니다. 수리는 하였겠지만 지금도 수돗물이 나오네요. 물을 마셔 보았는데 물 맛도 괜찮습니다.

 

 

물 저장탱크라고 합니다. 2,000년 전 물 저장고를 만들어 폼페이 시내에 차질 없이 물을 공급했었다는 것이죠.

 

 

술을 마셨던 술집(바)이었을 거라고 하네요. 향락을 즐겼던 로마인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곳은 사창가였던 곳인데 2층도 있고 귀족들의 방탕한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곳이죠. 돌 침대로 되었는데 저기다 불을 지피면 따끈하게 잠을 잘 수 있었겠네요.

 

 

수도관이 있습니다. 2,000년 전에 저런 수도관을 사용하여 주택마다 연결해 줘서 물을 공급했던 것이죠. 당시의 발달된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답니다.

 

 

폼페이 유적지는 고대 로마 귀족들의 삶과 휴양 문화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독특하게 꾸며진 주택과 장식된 벽화, 모자이크 등 여러 사람들이 공동으로 이용했던 장소들이 흥미롭네요. 쾌청한 날씨에 이쯤에서 인증샷 한 컷 날리고 갑니다.

 

 

폼페이 발굴 당시 나온 유물을 모아 놓았네요.

 

 

옛 신전 터가 남아 있는 유적지입니다. 폼페이가 그리스의 영향권에 있던 도시라는 것을 알게 해 주는 곳이지요. 로마제국이 번성하기 전에는 이탈리아는 물론이고 나폴리 근처의 주요 무역항이나 군사 시설 대부분 그리스의 식민지였습니다.

 

그리스에서는 학자, 예술가를 포함하여 많은 범죄자를 나라 밖의 식민지로 추방했는데 이탈리아로 추방된 사람들이 가장 많았다고 합니다. 이 추방자들 덕분에 이탈리아 남부 지역은 북부 지역에 비해 문화수준이 높아지게 되었다고 하네요.

 

 

베수비오 화산 폭발은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될 끔찍한 사건이네요. 그러나 이 비극적인 사건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당시의 생생한 현장은 물론이고 고대 로마 전성기의 모습을 볼 수 없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 덕분에 2,000년 전 여유를 즐기며 살았던 로마 사람들의 세련되고 아름다운 주택과 벽화, 경기장 같은 유적지를 비롯하여 당시 사람들의 생활 흔적을 모두 볼 수 있게 되었지요. 또한 폼페이는 일부 귀족이 쾌락적이고 향락적인 삶을 추구했던 곳으로 현대인에게 많은 교훈을 주는 곳이기도 합니다.

 

 

서기 79년 무더운 여름날. 화산 폭발로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던 도시 폼페이, 헤르쿨라네움, 오프론티스는 이제 긴 잠에서 깨어나 많은 사람들을 맞고 있는 것이죠. 폼페이 유적지를 찾는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면서 유적지를 둘러 볼까 ?

 

어떤 사람은 장엄했던 도시를 순식간에 삼켜 버린 자연을 원망하기도 하겠고, 어떤 사람은 화려한 벽화와 조각이 그려진 저택을 감상하며 이곳에서 살았던 사람들을 떠 올릴 거라고 생각됩니다.

 

 

폼페이는 현재 발굴이 끝난 곳 중에서 5분지 1 정도만 관광객에게 개방되고 있답니다. 남아 있는 유적지도 개방되는 날엔 더 값진 여러 가지 유물과 유적을 볼 수 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