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8월 24일.
오늘은 구연영 의사 순국 105주년 기념일입니다.
오늘 구연영 의사 순국 추모행사 추진위원회 주최로 대전국립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는 순국선열 구연영의사, 구정서 의사의 묘소참배 행사를 갖었습니다.
구연영 의사의 약력을 알아보면서 구연영 의사와 아들 구정서 의사의 높고 숭고한 뜻을 기리고자 합니다.
구연영 의사의 가장 큰 업적은 의병활동으로 일본군과 맞서 싸운 것과 하나님과 예수님을 전파하면서 이천읍교회(현재 이천중앙교회) 담임전도사를 비롯한 9개 교회를 이끌면서 주민들에게 끊임없는 선교활동을 하였다는 것. 그리고 구국회원들과 함께 끊임없는 애국계몽활동을 하였다는 것이 가장 큰 3대 업적이라고 말할 수 있답니다.
[대전국립현충원의 순국선열 구연영 구정서 묘소와 추모비]
구연영 의사의 약력을 소개합니다.
구연영 의사는 1864년 8월 20일 구철조씨의 3남으로 서울에서 출생하였습니다.
1895년 명성왕후 시해사건과 단발령으로 일본의 조선침략이 노골화되자, 구연영 의사는 김하락, 김태원, 조성학, 신용희와 함께 이천으로 내려와 1,000여명의 의병으로 이천수창의소를 조직하여 전국 최초로 의병항쟁의 기치를 내걸었지요.
이천수창의소의 중군장이 된 구연영 의사는 1896년 1월 넓 고개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첫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으며 그 후 이현 전투와 남한산성 전투를 비롯한 의병투쟁을 앞장서서 지휘하였습니다.
구연영 의사는 상동교회 전덕기 목사가 이끄는 엡윗 청년 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민족 운동가들과 교류하면서 민중계몽, 강연, 선교, 구국 활동과 독립운동에 전념하였습니다.
[이천중앙교회에 세워진 구연영 구정서 전도사 순국 추모비]
구연영 의사는 이천중앙감리교회 3대 담임전도사로 부임하여 경기도 광주, 이천, 여주, 양평지방을 돌며 전도하였고 노곡, 궁평, 이포, 양평등지에 교회를 설립하였답니다.
구연영 의사는 1905년 정식 전도사 칭호를 받고 이천읍 교회를 비롯한 9교회 교인들을 이끌게 되었는데 그는 칼 대신 성경을 들고 십자가의 구원을 외치며 이천, 광주, 장호원, 여주지방을 순회하였고, 자신의 집 앞에다 장대 끝에 십자가를 매달아 세워놓고 예배를 드리면서 의병활동과 선교활동, 애국계몽활동을 병행하였으며 밤에는 구국회원들과 기도회를 열고 항일계획을 논의하였습니다.
구연영 의사의 설교 주제는 늘 항일과 일진회의 정체 폭로였으며 일본의 죄상 폭로였다. 이러한 규탄 강연으로 일본 측으로부터 주목을 받아 오던 중 일진회의 밀고로 아들 정서와 함께 체포되었습니다.
[이천시 창전동에 세워진 민족운동가 구연영 순국기념비]
구연영 의사 부자는 이천 관아(전 이천경찰서 자리)로 끌려가 갖은 고문을 받으면서도 신앙과 애국의 신념은 변하지 않았고, 일본경찰로부터 애국동지 명단 공개를 강요당했으나 끝내 함구하고 굴하지 않았스비다.
일본 경찰들은 비분하는 부자의 팔다리를 칼로 찌르고 갖은 고문을 자행했으며 결국 이천 장터 홰나무 아래 묶인 채 부자가 함께 당시의 관아 서편 작은 언덕(창전동 365번지)에서 총살당하였습니다.
이날이 1907년 8월 24일(음력7월 16일)로 그 때 구연영 의사의 나이 44세였으며 아들 정서의 나이는 25세였답니다.
1963년 3월 1일 구연영 의사는 대한민국정부로부터 건국 공로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았고 아들 정서에게는 1991년 건국 공로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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