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글

독립운동가 구연영(具然英) 의사 항일운동 투신기

아침햇쌀 2014. 2. 3. 08:37

- 을미의병의 쾌거, 구국계몽운동으로 꽃피우다 -

                                 

                                   유교 가문  

선생은 1864년(고종 1) 6월 20일 구철조(具哲祖)의 3남으로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능성(綾城)이며, 자를 춘경(春景)이라 하였다. 선생의 가문은 누대에 걸쳐 대제학 등 문한직을 많이 배출한 집안이었다. 이러한 가풍에서 성장한 선생도 한학에 능통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선생은 대한제국 정부에서 일시 관직에 있다가 일제 침략이 자행되자 사직했다고 하는데, 선생이 관직에 있던 사실은 잘 확인되지 않는다.

 

선생의 집안은 원래 대대로 경기도 광주군 실촌에 세거해온 유력 가문이었다. 의병활동 후 선생이 실촌읍 노곡리에 정착했던 사실이나, 선생과 함께 활동했던 의병 가운데는 안옥희(安玉熙) 등 광주 출신의 의병들이 다수 동참했던 정황 등은 모두 이와 같은 지역적 연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선생은 18세 때 전의 변씨와 혼인하여 4남을 두었다. 장남은 정서(禎書), 차남은 성서(聖書), 삼남은 완서(完書), 사남은 종서(鍾書)이다. 장남 정서는 후술하겠지만 선생과 같은 감리교 전도사가 되어 구국운동에 참여하였다가 부자가 함께 순국하였다. 차남 성서와 사남 종서 역시 목사가 되었다.

 

자료부족으로 선생의 유년기와 성장기는 잘 드러나 있지 않지만, 정황으로 보아 일찍부터 문무를 겸비하며 호연지기를 키워갔을 것으로 어렵지 않게 짐작된다. 또 유학적 가풍에 따라 엄격한 충효의 정신을 바탕으로 충군애국 사상을 배양해 갔을 것이다.

 

항일의병 투신

 

선생이 역사의 전면에 부상하게 되는 것은 일제 침략에 항거하여 항일의병이 봉기하던 때였다. 선생이 장성하던 무렵, 일제의 침탈로 인해 국운은 날로 기울어 가고 있었다. 특히 1894년 동학농민전쟁을 기화로 일제는 청일전쟁을 도발하면서 한국침략을 더욱 가속화해 갔다. 우선 일제는 1894년 6월 자국의 군대로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을 무단 점거하는 등 군사적 침략을 감행하였다. 그리고 군국기무처를 설치하여 개혁, 근대화라는 미명하에 조선의 전통적 문물제도를 일시에 바꾸는 갑오경장을 강제로 추진함으로써 정치, 문화적 침략을 병행하였던 것이다.

 

전국적으로 의병이 봉기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 을미사변과 단발령은 이러한 일제 침략의 일환으로 자행된 것이었다. 1895년 8월(음력)에 일어난 을미사변은 청일전쟁 이후 배일세력의 중심인물로 부상되어 있던 명성황후를 시해하기 위해 도발한 만행이었고, 갑오경장의 일환으로 1896년 11월(음력) 공포한 단발령은 성인 남자의 상투를 제거함으로써 민족자존의 상징과 존엄을 무참히 짓밟았다. 이처럼 연속된 일제의 대한침략은 우리 민족의 공분(公憤)을 불러 일으켰다.

 

이에 단발령 공포 직후 전국 각지에서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의병이 봉기해 항일투쟁을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선생이 참여했던 남한산성의진은 유인석이 이끈 제천의병과 이소응의 춘천의병, 민용호의 강릉의병, 노응규의 진주의병, 권세연의 안동의병, 김복한의 홍성의병 등과 함께 전기의병(을미의병)을 상징하는 단위부대로 평가되고 있다.

 

 

선생이 중심인물로 참여했던 이천수창의소(남한산성의진)는 1895년 11월 15일(음) 단발령 공포 직후 전국에서 가장 먼저 편성되어, 서울에서 가장 근접한 군사적 요충지인 남한산성을 한 달 이상 점거한 채 서울 진공을 눈앞에 두었을 정도로 성세를 크게 떨친 의진이다. 특히 서울의 인후인 남한산성을 점거하고 서울 진공계획을 구상한 것은 뒷날 1908년 1월 십삼도창의군의 별동대가 서울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진격한 사례와 같이 일제 침략세력에게 직접적이고도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 '동경조일신문(東京朝日新聞)' 등 일본 신문들이 남한산성 점거 과정에서부터 해체 때까지 한 달 동안 거의 매일같이 의진의 동향을 분적적으로 상세히 보도하였던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선생이 항일의병 전선에 동참하게 되는 구체적인 과정을 알려주는 자료는 현재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선생의 동료 가운데 한 사람이던 해운당(海雲堂) 김하락(金河洛)이 남한산성의병이 태동되던 단계부터 해산할 때까지 과정을 일기식으로 기록한 자료가 남아 있어 이를 통해 선생이 수행한 항일전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서울에 거주하던 선생이 의병에 투신하게 되는 것은 단발령이 그 계기가 되었다. 단발령 공포로 서울 도성의 인심이 극도로 흉흉해지고 항일 적개심이 일시에 솟구치게 되자, 선생도 이에 격분하여 김하락을 비롯하여 조성학(趙性學)․김태원(金泰元)․신용희(申龍熙) 등의 우국지사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기로 결의하고 이천으로 내려갔던 것이다.

 

선생을 비롯한 지사들은 단발령 공포 다음날인 11월 16일(음) 이른 아침에 한강을 건넜고, 17일 이천에 들어갔다. 선생이 이천에 들어간 날이 곧 양력 1896년 1월 1일로, 이 날 이후 정부에서는 양력을 공식적으로 사용하게 되는 것이다.

 

선생을 비롯한 지사들은 이전부터 친분이 있던 화포군(火砲軍) 도령장(都領將) 방춘식(方春植)과 협의하여 포군(砲軍) 100여 명을 선발한 뒤 이들을 근간으로 인근 각지의 의병 모집에 나섰다. 이때 선생은 양근(陽根)․지평 일대로 들어가 그 지역에서 300명의 의병을 모집하였다. 또한 조성학은 광주, 김태원은 안성, 신용희는 음죽으로 파견되어 각 군(郡)에 소속된 포군들을 중심으로 의병을 모집하였다. 이처럼 인근 각지에서 모집한 의병들이 이천에 모여 이천수창의소(利川首倡義所)라는 연합의진을 세웠던 것이다.

 

이천수창의소 중군장

 

이천수창의소 연합의진의 지휘부는 안성에서 온 민승천(閔承天)이 창의대장에 추대되었고, 도지휘(都指揮) 김하락, 도총(都總) 조성학, 좌군장 김귀성(金龜性), 우군장 신용희, 선봉장 김태원 등으로 이루어졌는데, 이때 선생은 의진 내에서 가장 중요한 직책인 중군장을 맡게 되었다. 이후 의진의 편제는 몇 차례 바뀌었지만, 선생의 중군장 소임은 한결같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처럼 의병전선에 참여한 선생은 1896년 1월 18일(음 1895년 12월 4일) 백현(魄峴; 이천 널고개)에서 일본군 100명을 상대로 첫 전투를 벌여 승리하게 된다. 매복 기습전으로 압승을 거두었던 이 날의 전투상황에 대해 김하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여 당시 의병의 의기충천하던 기세를 짐작하게 한다.

 

(전략) 적병이 고함을 치며 뒤를 따라 쫓아와 백현 아래에 당도하였다. 그때 문득 대포소리가 울리며 구연영은 전면을 가로막고, 김귀성․신용희는 산 중턱으로부터 쏜살같이 내려오고, 조성학은 적의 퇴로를 차단하여 사방에서 협격하니, 적은 포위망 속에 빠져서 진퇴의 길이 없었다.

 

 (중략) 적병은 죽은 자가 수십 명이고, 우리 군사는 한 사람도 상한 자가 없었다. 한참동안 무찌르다 보니, 날은 이미 저물어 초생달은 서쪽 하늘에 떠 있는데, 서릿 바람은 뼛속을 뚫는 듯하였다. 이윽고 달은 지고 저녁 10시경이 되자, 적은 한 가닥 길을 찾아서 몰래 도망하므로 좌우의 우리 군사는 밤새도록 뒤를 쫓아 광주 장항(獐項) 장터에 도착하였는데, 바로 5일 새벽이었다. 샛별은 빤짝이고 닭 우는 소리는 여기저기 들리는데, 위 아래 행진(行陣)에서는 포성이 끊이지 않았다.

 

위의 인용문에서처럼 이천수창의소 의병들은 백현전투에서 승리한 뒤 그 기세를 이어 패주하는 적을 광주 노루목[獐項] 장터까지 추격해 무기․군량 등 많은 전리품을 노획한 뒤 돌아왔다. 더욱이 백현전투 승리 이후 1월 27일에는 고종으로부터 의병활동을 독려하는 다음과 같은 애통조칙(哀痛詔勅)이 비밀리에 도착함으로써 의진의 사기는 더욱 고무되기에 이르렀다.

 

대전 국립현충원의 구연영 의사, 구정서 의사 부자의 묘역

 

왜적이 궁궐을 침범하여 사직의 안위가 조석에 임박하니 토적(討賊)에 진력하라. (중략) 김병시(金炳始)로 삼남창의도지휘사(三南倡義都指揮使)를 삼고 계궁량(桂宮亮)을 목인관(木印官)으로 하여 장차 목인을 내릴 것이다. 경기에는 순의군(殉義軍), 충청에는 충의군(忠義軍), 영남에는 장의군(仗義軍)으로 하여 팔도에 내려 보내니 팔도 각군은 일제히 거의(擧義)토록 하라.

 

그러나 민승천을 대장으로 하는 이천수창의소 의진은 얼마 뒤 서울에서 파견된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패산하고 말았다. 2월 13일 일본군 200여 명이 이현(梨峴)에 주둔하고 있던 의병을 공격해 왔다. 의병들은 적의 공격을 예상하고 요로에 군사들을 매복시키는 등 최선을 다해 저항하였으나, 혹한 속에서 강한 북서풍을 안고 싸우게 되어 전세가 차츰 불리해졌다. 이때 이현 동쪽 입구를 지키고 있던 선생도 전력을 다해 저항하였으나, 불리한 전세를 돌이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에 중심인물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재기를 기약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선생은 원주 방면으로 이동하여 재기를 모색하고 군사를 모았다. 김하락은 심상희((沈相禧))가 이끄는 여주 의진을 찾아가 재기 항전을 협의하였고, 대장 민승천은 죽산으로, 그리고 조성학은 영남 방면으로 내려가 각기 재기 방략을 찾고 있었다.

 

원주 방면에서 수백 명의 군사를 모아온 선생을 비롯하여 사방으로 흩어졌던 민승천․신용희․전귀석․김태원 등의 동지들은 2월 25일 광주 이현에 다시 모여 포군과 민병을 규합하여 재기 항전을 천명하였다. 이때 모인 의병 수는 포군 1천 800명을 포함하여 2천여 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이때 개편된 의진의 편제와 담당 인물을 보면, 새로운 의병대장에 박준영(朴準英)이 선임된 것을 비롯하여 선생은 중군장의 중책을 그대로 맡았으며, 여주대장 심상희, 군사겸 도지휘관(軍師兼都指揮) 김하락, 도소모(都召募) 전귀석, 선봉장 김태원, 좌익장 김귀성, 후군장 신용희, 우익장 김경성 등이었다.

 

남한산성 점거

 

이 무렵 광주 일대에서는 이천 연합의진과는 별도로 심진원(沈鎭元, 혹은 沈鑏澤)을 주장으로 삼고 일어난 일단의 의병이 활동하고 있었다. 광주군수 박기인(朴基仁)도 이 무렵 의병에 의해 처단되었을 만큼 성세를 떨쳤다. 그리고 심진원의 광주의병은 이천 연합의진에 앞서 2월 23일 남한산성을 장악하여 활동 근거지로 삼고 있었다. 그러나 소수에 불과한 광주의병은 참령(參領) 장기렴(張基濂)의 인솔하에 서울에서 출동한 관군 800명의 공세로 인해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이에 심진원은 이천 연합의진에 서한을 보내 합세를 요청하였고, 여기에 호응하여 이천 연합의진은 2월 28일 관군의 포위망을 뚫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광주의병과 합류하게 되었다.

이때 일본의 '동경조일신문'은 의병의 남한산성 점거상황을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남한산성 안의 적(의병) 수는 약 1천 6백 명 이다. 그 가운데 1천여 명은 광주․이천, 그리고 양근(양평)의 포군, 즉 구 지방병이고, 그 나머지 6백 명은 광주의 농민이다. 적의 수괴(의병장)는 광주의병장 심영택, 이천의병장 박주영(朴周英, 박준영), 양근의병장 이석용(李錫容) 등 3명이다.

 

위의 기사를 통해 남한산성에 모인 연합의병 가운데 근간이 되는 병력은 광주의 포군과 농민이며, 이천과 양평에서도 많은 의병이 모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남한산성 점령 후 의진 지휘부에서는 적의 내습에 대비해 요처마다 군사를 배치하고 수성에 만전을 기하였다. 선봉장 김태원은 남문을, 후군장 신용희는 북문을, 우익장 김경성은 서문을, 좌익장 김귀성은 동문을 각각 파수케 하였고, 그리고 의진의 본부가 있는 중앙부는 중군장인 선생이 맡아 지켰다.

 

남한산성

 

이천 연합의진이 광주의병과 연합하여 수도 서울의 군사적 요충지인 남한산성을 점거하게 되자, 일제는 큰 충격을 받고 이를 탄압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이에 다급해진 일제는 정부로 하여금 강화도에 주둔하던 정예 관군 300여 명을 남한산성으로 증파하면서 성을 에워싼 채 의병을 더욱 압박하였다. 이 때의 포위상황을 보면 성 안의 의병 2천 명에 대하여 관군은 친위대와 강화병을 합하여 3개 중대와 2개 소대로, 지휘소를 남문 밖 매착동(梅着洞)에다 설치하고 1개 중대를 배치하였다. 그리고 동문 밖 불당곡(佛堂谷)과 향교리(鄕校里)에 각 1개 중대, 서문 밖 석회당(石會堂)과 동문쪽 엄현리(奄峴里)에 각 1개 소대를 분산 배치하고 군수미 보급로를 차단하며 포위공격의 태세를 취하였다.

 

성 안의 의병과 성 밖의 관군 간에는 연일 크고 작은 전투가 산발적으로 계속되었다. 하지만 전투 때마다 지리적으로 우세한 의병 측에 전황이 유리하게 돌아갔다. 관군은 기습작전을 펴기도 하고 화공을 계획하기도 하는 등 다양한 공략전을 벌였으나, 그때마다 의병의 반격으로 번번이 격퇴당해 성에 접근할 기회조차 얻을 수 없었다.

 

산성을 사이에 두고 의병과 관군간 대치가 계속되는 동안 의병 측에서는 서울 진공을 목표로 앞으로의 활동방향을 설정해 가고 있었다. 서울 진공은 실제로 많은 의진들이 표방하고 있었던 구호이지만, 대개의 경우 그 실현 가능성은 미약하던 실정이었다. 하지만, 남한산성의병의 경우에는 강력한 전력 면에서나 서울에 근접한 지리적 위치 면에서 볼 때 구호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상당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적지 않다.

 

그러나 의진의 서울진공 계획은 4월 3일(음 2.21) 남한산성의 함락으로 중단되고 말았다. 철옹성과 같던 남한산성 공략이 여의치 않자, 관군 측에서는 비밀리에 김귀성을 통해 박준영을 매수하였던 것이다. 즉 귀순하는 경우에 박준영에게는 광주유수를, 김귀성에게는 수원유수를 제수한다는 미끼로서 이들을 매수한 것이다. 관군에 매수된 이들은 전날 저녁 전군에게 술과 음식을 내려 회식연을 성대히 벌였다. 그의 흉계를 눈치 채지 못한 의병들은 만취가 되어 깊은 잠에 빠졌으며, 각 성문의 파수를 맡았던 군사들조차 대취하고 말았다. 다음날 새벽, 이미 정해진 계획에 따라 박준영이 서문과 북문을 열자 문 밖에서 대기 중이던 관군들이 함성을 지르며 일시에 성 안으로 몰려들었다. 당황한 의병들은 전열을 정비할 틈도 없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말았다. 이처럼 소란스런 와중에도 배신행위가 드러난 박준영은 두 아들과 함께 의병들에게 총살되었다고 한다.

 

무방비 상태에서 기습을 당한 전세에도 불구하고, 이 날의 수성전에서 의병들은 보여준 감투는 놀라웠다. 당시 선두에서 전투를 지휘한 전군장 김태원이 남긴 다음 기록을 통해서 이러한 정황이 확인된다.

 

적병은 일제히 산에 올랐고 서로 공격하였는데 어둠이 칠흑과 같았고 동서가 구분되지 않았다. 삼경부터 날이 밝기까지 큰 싸움이 끊이지 않았다. 시체가 쌓이고 피가 흘러 죽은 병사와 군마의 수가 5백 명이었고, 적병의 죽은 자가 3백 명이었다. 이에 포위망을 뚫고 동쪽으로 탈출하여 싸우며 행군하였는데, 처음 성 밖으로 나갔을 때 따르는 군사가 4백 명이었다.

 

 

이처럼 의병은 남한산성을 점거한 지 한 달만에 관군의 공격으로 와해되고 말았으며, 많은 희생자를 남긴 채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동안 쌓아놓은 인적, 물적 기반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어 항전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근거지를 찾아 이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생을 비롯한 잔여 의병들이 영남지방으로 내려간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영남의병과 연합항전

 

선생은 남한산성에서 패배한 뒤 재기를 위해 잔여 의병 수습에 혼신의 힘을 다하였다. 신용희․김태원 등의 동지들과 함께 전열을 가다듬은 선생은 연장자였던 김하락을 의병장에 추대하여 영남지방을 향해 내려갔다. 그곳에서 인재를 모아 재기 항전을 도모하기 위해서였다.

 

4월 9일(음 2.27) 동지들과 함께 장도에 오른 선생은 여주를 지나 제천․단양․풍기․순흥을 차례로 거쳐서 4월 20일경 드디어 영남의 본향 안동 지경에 이르렀다. 그동안 제천에서는 유인석 의병장의 환대를 받았고, 순흥에서는 본가에 내려가 있던 동지 조성학과 합세하기도 하였다. 안동 지경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유인석이 거느리던 제천의병의 한 분파인 서상렬(徐相烈) 부대로부터 연합 제의를 받아 예천에서 일시 조우하기도 하였고, 봉정사에서 다시 만나 영남의병과의 연합항전 방략을 논의하기도 하였다.

 

이후 선생은 5월 하순 의병투쟁을 종료하고 고향으로 돌아갈 때까지 한 달 동안 청송․의성 일대를 전전하면서 수차에 걸쳐 관군을 상대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청송 감은리(甘隱里)에서 치른 격전이 가장 큰 전투라 할 수 있다. 선생을 비롯한 남한산성의병 100여 명은 경주 방면으로 남하하기 위해 의성․청송 지경으로 이동하였는데, 5월 13일(음 4.1) 청송 화목(和目)에 이르러 의성에서 넘어온 의진과 만나고 또 청송의진과 합세함으로써 의성, 청송의진과 연합전선이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감은리 전투는 5월 14일(음 4.2) 청송군 안덕면 감은리 뒷산 성황현(城隍峴)에서 벌어졌다. 이 날 의병들은 대구에서 출동한 관군 170명이 의병 탄압을 위해 청송 화목으로 진격해 오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대비책 마련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신용희는 2대의 군사를 거느리고 안덕 뒤 상봉에 잠복하였고, 조성학은 2대의 군사로 성황현에 매복하였으며, 김경성도 2대의 군사를 거느리고 성황 주산(主山)에 매복해 있었다.

 

이때 선생도 역시 2대의 군사를 거느리고 안덕 후방에 매복한 채 적군이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상종이 거느리던 의성의병은 앞선 전투의 피로 때문에 관망하고 있었고, 청송의진도 안덕 속곡(束谷)으로 물러나 있었기 때문에 초기 전투는 선생을 비롯한 남한산성 남하의병들이 거의 단독으로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관군은 이 날 정오 무렵 의병들이 매복한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하고 안덕을 향해 성황현까지 행군해 왔다. 이때 의병들이 일제히 사격을 개시하자 당황한 관군은 일시에 전열이 무너져 후퇴하였다. 이어 선생이 지휘하던 부대를 비롯해 사방에 매복해 있던 의병들이 이들을 추격해 10여 명을 사살하였다. 전열이 흩어진 관군은 앞산을 향해 달아났고, 의병들은 이들을 습격하여 다시 수십 명을 쏘아 죽였다.

 

그 뒤 관군들이 전열을 가다듬고 다시 의병을 공격해 왔으나 이대 전세는 기울어 있었다. 중군 김대락 등이 거느리던 청송의진 수십 명이 가세해온 것은 이 무렵이었다. 이에 의병들은 관군을 추격하여 10여 명을 추가로 사살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남한산성 의병들은 감은리 승전의 주역이었고, 그 가운데서도 선생은 교전 현장에서 의병장 김하락 등과 함께 시종일관 전투를 지휘한 주장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김하락의 진중일기에는 수차에 걸쳐 벌어진 이 날의 전투상황이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 날 정오에 적병이 화목으로부터 안덕 뒤 강변에 이르러 즉시 우리 군사에게 공격을 가해 오는데, 이때에 군중으로 하여금 포를 터뜨리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적은 전혀 분위기를 모르고 곧장 성황현에 이르렀다. 이제 곧 천보총 5정을 내어 일제히 포를 터뜨리니 적진의 전열이 무너지므로 이에 기를 휘두르며 크게 외치니 사방 복병이 한꺼번에 발동하여 적의 군사는 탄환에 맞아 죽은 자가 10여 명이 되자, 적병은 크게 혼란하여 앞산을 향해 도망치는 것이었다. 포를 잘 쏘는 우리 군사 10여 명이 천보총을 가지고 뒤를 쫓아 총을 쏘아 수십 명을 죽이니, 적이 마침내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가므로 드디어 퇴군하여 본진으로 돌아와 점심을 먹으려 하는데, 적이 이때를 틈타 다시 반격하므로 곧 좌우로 하여금 일제히 포를 쏘게 하였다.

 

감은리 승전 후 선생을 비롯한 남한산성 의병들은 의성의진의 주장 김상종의 건의를 받아들여 의성 방면으로 서행(西行)하여 금성산 자락에 있는 수정사(水淨寺, 금성면 소재)로 이진하였다. 관군들은 의병을 이곳까지 추격해 왔고, 5월 20, 25일에 금성산, 비봉산 일대에서 다시 양 진영간에 일진일퇴 공방전이 벌어졌다.

 

기독교 수용

 

선생이 일제의 국권침탈에 격분하여 참여했던 의병 활동은 여기서 종료되었다. 의성 수정사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 이후 선생은 경주 방면으로 남하하는 김하락 등 동료 의병들과 작별하고 5월 27일(음 4.15) 휘하 30여 명의 군사들과 함께 이천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경기도와 경상도를 무대로 거의 반년간에 걸쳐 전개한 의병항전은 이로써 종료되었으며, 이후 선생은 종래 견지해온 유학적 신념과 사고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이념과 방략에 따라 항일구국투쟁을 지속적으로 펼쳐가게 되는 것이다.

 

선생이 김하락 등 동료 의병들과 결별하게 되는 이유는 명확하지 않지만 다음 두 가지로 생각된다. 오랜 행군과 연전으로 인해 의병들의 전력이 급격히 떨어져 더 이상 무장항전을 지속하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하였고, 또 향후 항일전을 모색하고 구상하는 과정에서 지도부간에 이견이 생겨 상호 갈등이 야기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김하락의 기록에 감은리 승전 이후 수정사로 행군하여 후속 전투가 벌어지는 과정에서는 선생의 활동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 점도 이런 정황 때문인 듯하다.

 

구연영 의사 순국 100주년 추모행사추진위원회에서 세운 순국 기념비

 

1896년 여름, 고향으로 돌아온 선생은 광주군 도척면 노곡리에 정착한 뒤 기독교에 투신하여 새로운 구국투쟁의 길을 모색하게 되었다. 선생이 기독교에 입교하는 과정은 명확하지 않지만, 제헌국회의원이기도 한 원용한(元容漢, 1877-1959) 목사의 회고에 의하면, ‘모든 생각과 계획을 일소하시고 춘몽을 깨신 듯이’ 1897년 2월 스스로 서울 남대문의 상동교회로 스크랜턴(W.B. Scranton) 목사를 찾아가 입문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뒤 3년이 지난 1899년 3월 선생은 이천지역에서 최초로 설립된 마장면 덕평리의 덕들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기독교에 입문하여 세례를 받기까지 3년 동안 선생은 신앙활동과 구국투쟁이라는 두 가지 이질적 요소를 현실적으로 조화시켜 가는 문제로 인해 심한 갈등을 겪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천지역에서 활동한 감리교 선교사의 1902년 한 보고서에서 “구춘경은 덕들교회에서 처음 학습을 받았다.

 

그후 그는 우리를 돕는 매서인(賣書人) 중에 가장 활발하게 활동한 사람이었다. 그는 덕들에서 학습을 받기 전 이미 3년 동안 기독교인으로서 신앙을 고백하고 있었다. 당시에 그는 그리스도 복음 안에 있는 은혜의 충만하심을 이해하지 못한 채, 개인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한 방편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교인의 대표적인 예였다.”라고 기록한 대목이 이러한 정황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구국을 향한 의지와 열정은 선생이 기독교인이 되고 나서도 조금도 달라지지가 않았던 것이다.

 

선생의 신앙활동에 많은 영향을 주었던 인물은 스웨어러(W. C. Swearer, 한국명 서원보) 감리교 선교사로, 그는 바로 이천지역 초기 기독교운동의 핵심인물이었다. 서원보는 선생이 이천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기간이기도 한 1898년부터 1907년까지 10년 동안 이천지역 감리교 책임자였다. 이 기간에 선생은 그를 도와 교회설립과 선교활동을 열정적으로 펼쳤다. 세례 이후 선생이 가장 먼저 한 일은 교회를 세우는 것이었다.

 

선생은 자신의 집에다 노루목교회를 세웠는데, 집 앞에다 장대 끝에 십자가를 달아 세워놓고 예배를 보았다고 한다. 선생은 오랜 인습에 젖은 주변 사람들로 인해 선교과정에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다.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상민과 노복들에게도 존칭을 쓰는 등 파격적인 언행으로 말미암아 문중 어른들의 노여움을 사서 집안에서 쫓겨나기까지 했을 정도였다. 이러한 고난에도 불구하고, 의병 시절에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여러 동지들이 그를 따라 기독교로 전향함으로써 이후 기독교 전파와 구국회 운동에 든든한 동반자가 되어 주었다. 이처럼 신앙활동에 열성적이던 선생은 1902년 지역 교회를 관리할 수 있는 직분인 권사가 되었다. 이 무렵 광주에서 이천 읍내로 이주하였으며, 이천 구역 24개 교회를 관리하는 책임을 맡았다.

 

구국회 활동

 

구국의 일념을 견지하던 선생은 서울의 상동교회를 찾아가 기독교에 입문할 때, 전덕기(全德基, 1875-1914)를 만났다고 한다. 상동교회가 기독교 항일독립운동의 본산으로 기능했던 점에서나, 그 중심에 전덕기 목사가 있었던 점에 비추어 볼 때, 기독교 신앙과 구국 항일투쟁을 일체화했던 선생이 상동교회를 찾고, 그리고 전덕기 목사와 만나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음을 짐작케 한다. 전덕기 목사는 상동청년회를 조직하여 상동교회를 민족운동의 최고 요람으로 만든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천 출신이었던 전덕기와 이전부터 서로 친분관계를 갖고 있었는지 여부는 알 수가 없지만, 선생은 교회활동과 구국투쟁을 일체화시켜 추진하는 과정에서 상동엡윗청년회와 그 후신인 상동청년회 참여를 통해 그로부터 상당한 지도와 도움을 받았을 개연성은 정황상 크다고 인정된다.

 

이천중앙교회에서 진행된 구연영 의사 순국 106주년 기념 추모행사

 

기독교 신앙을 구국투쟁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선생은 이천에서 구국회(救國會)라는 애국단체를 결성하였다. 선생이 구국회를 결성한 시기와 경위는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1902년 기독교 신앙을 마음 속으로 수용한 직후일 것으로 추정된다. 구국회의 조직, 행동 강령이 아래와 같이 철저히 기독교 교리와 신앙에 입각해 있었던 점으로 보아 그러한 정황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信)은 진실한 신념으로 상제(上帝)를 신봉하고 기독의 교훈으로 죄과를 회개하고 진리의 삶으로써 완전한 인간의 기초로 삼고자 함이요, 망(望)은 확고한 소망을 가지고 관존민비(官尊民卑)·의타사상(依他思想)·직업차별·미신허례 등 악풍 폐습을 타파 개선하며 신교육을 흡수하여 현실만에 낙념(落念) 말고 직업에 충실함이요, 애(愛)는 진정한 애의 정신으로 경천애인(敬天愛人)을 표어로 하고 하느님을 공경하며 조국을 사랑하고 동포를 사랑하며 정의로 단결하여 모르는 사람을 깨우치는 조국광복의 기초라.

 

선생이 조직한 구국회는 이처럼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믿음·소망·사랑 등 세 가지 강령을 실천하여 구국, 곧 나라의 독립을 이룩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앞서 투신했던 의병투쟁의 한계로 깊은 좌절을 경험했던 선생이 기독교를 수용한 후 선택하게 된 최선의 구국운동이 기독교 신앙에 기초한 국권회복운동이었던 것이다. 신앙에 기반을 둔 구국회의 활동은 이즈음 이천․여주․광주 일대에서 기독교세가 급격히 팽창함에 따라 더욱 활발하게 전개되어 갔다.

 

구국회의 활동이 일대 전기를 맞게 되는 것은 1905년 11월 통한의 망국 조약인 을사조약의 늑결이었다. 이 해에 선생은 교회활동과 신앙생활에서도 일대 전기를 맞이하였는데, 곧 전도사 보임이 그것이다. 이 해에 전도사가 된 선생은 교세확장에 따라 분리 독립된 이천 구역의 담임을 맡아 이천중앙교회에 부임하였다.

 

이 무렵 치욕스런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항일 적개심이 비등하고 망국의 위기의식이 팽배하면서 을사조약 반대투쟁이 거세게 일어나고, 최익현이 거느리던 태인의병과 민종식의 홍주의병을 필두로 전국 각지에서 재기한 의병이 항일전을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이 시기는 선생이 을미사변과 단발령 공포를 계기로 의병에 투신했던 10년 전과 비슷한 총체적 위기상황이 재현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선생은 이천·광주·여주 등지를 돌면서 구국회를 기반으로 한 군중집회를 통해 구국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였다. 일제의 침략행위를 규탄했으며 조약 철회를 촉구하였다. 또 국권수호를 위한 인민의 단결을 호소하고 시장 철시(撤市)를 통한 비폭력 저항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선생이 구국회의 군중집회에서 특히 열성을 기울였던 것은 일진회(一進會)의 반민족 매국행위를 성토하는 일이었다. 일제의 주구 노릇을 하던 매국적 송병준이 주동이 되어 1904년에 결성한 친일단체 일진회는 일제로부터 막대한 자금지원과 비호를 받아 전국적인 친일조직으로 확대되었고, 일제의 침략에 호응하여 온갖 친일 매국행위를 자행하여 우리 민족의 공적(公敵)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선생이 교회활동과 구국투쟁을 열심히 병행해 갈 수 있었던 데는 장남인 구정서의 조력과 역할이 컸다. 구정서는 1882년 서울에서 출생했으며, 자는 흥국(興國)이었다. 일찌이 부친과 따라 상동교회에 올라와 엡윗청년회에 가입하여 전덕기 목사의 지도하에 교회활동과 구국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1902년 감리교 지방회가 열렸을 때에는 이천 구역을 대표해서 유사의 자격으로 참석하였고, 그해 11월 장춘명․김제안 등 교회 유력자들과 함께 권사 직책을 받았다.

 

그후 22세 때인 1904년에는 이미 전도사가 되어 서울 동문안교회를 담임하였다. 이런 정황으로 보아 일찍부터 교단의 중요인물로 부상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교회활동과 더불어 구정서는 부친의 영향하에 애국단체 보안회(保安會)와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에 가입하여 구국운동도 활발히 병행하고 있었다. 특히 그는 1905년 을사조약 늑결 이후 부친을 도와 구국회의 조직과 실무를 맡아 구국활동을 적극 펼쳐나가고 있었다.

 

부자(父子) 순국

 

일병 오십여 명이 이천읍 안에 들어와서 예수교 전도인 구연영․구정서 부자를 포살하고 그 근처 오륙 동리를 몰수히 충화(衝火)하였다더라.

 

1907년 8월 29일자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부자구몰’이라는 제하의 기사이다. 선생 부자가 순국한 지 5일 뒤에 실린 것이다.

위 기사는 일본군대가 선생 부자를 위해할 목적으로 출동한 사실을 알려주고 있으며, 또 인근 5-6개 동리를 모두 방화했다는 것으로 미루어 일본군은 선생과 관련된 항일세력의 근거지까지 철저하게 탄압하려 한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일제 군경이 선생의 구국투쟁에 대해 그만큼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었다는 생생한 증좌인 셈이다. 당시 일진회에서는 공공연히 ‘서울 동편 10여 군에는 구연영만 없으면 기독교도 없어질 것이요, 배일자(排日者)도 근절될 것’이라는 말이 나돌았다고 하는데, 항일투쟁과 교회활동의 구심점으로서 이 지역에서 차지하고 있던 선생의 위상과 역할을 미루어 짐작케 한다.

 

이천중앙교회에 세워진 구연영 의사, 구정서 의사 순국 추모비

 

이와 같은 분위기에서 선생은 결국 일진회원의 밀고로 출동한 일본군에 의해 장자 구정서와 함께 체포되기에 이르렀다. 피체 후 동지들을 대라는 고문을 받았는데, 선생은 의연히 “이 땅에 와서 너희들이 이처럼 무도한 강도질을 하는데 하나님이 무심하실 줄 아느냐. 동지들을 말한다면 일진회 놈들을 빼고는 모든 백성들이 나의 동지들이다.”라고 하며 오히려 일제의 죄상을 성토했다고 한다. 이에 선생은 구정서와 함께 1907년 8월 24일(음 7.16) 총살을 당해 부자가 동시에 순국하고 말았다. 당시 선생은 향년 44세였고, 구정서는 25세였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선생은 일제침략으로 국운이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상황에 놓이게 되자, 구국투쟁에 온 몸을 던졌던 인물이다. 먼저 의병에 투신하여 전선에서 생사를 넘나들며 분전하였지만, 국운을 돌이킬 수 없었다. 이에 무장투쟁의 한계를 절감한 선생은 기독교를 과감히 수용하여 교회활동을 구국투쟁으로 승화시켜 갔다. 유교에서 기독교로 종교와 이념을 바꾸고, 무장투쟁에서 대중구국운동으로 투쟁방략을 과감하게 바꿔갔던 것이다. 선생은 마침내 교회와 민족 두 가지를 동등한 절대가치로 인식하기에 이르렀고, 이를 수호하기 위해 순국, 순교를 감내한 동시대 역사의 위인이었다.

글쓴이 : 박민영(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