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이야기

이천쌀의 유래

아침햇쌀 2009. 6. 25. 15:59

이천쌀의 유래


우리나라에서 가장 좋은 품질의 쌀이라 하면 단연 경기도 이천의 자채쌀을 꼽는다. 이천쌀은 깨끗한 물, 기름진 토양 그리고 벼의 생육의 가장 알맞은 기후 조건이 혼합하여 만들어진 자연 예술의 결정체라고 할 정도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처럼, 예로부터 쌀이라면 첫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유명한 이천 쌀은 이천과 여주의 일부지역에서만 생산되었던 특수한 품종으로 특히 안흥리 방죽 앞으로 펼쳐진 넓은 구만리 뜰이 쌀의 주 생산지였다고 한다. 자채벼의 모양은 작고 둥글며 붉은 수염이 있고, 이 쌀로 밥을 지어 놓으면 희다 못해 푸른기가 돌며 기름이 자르르 흐르고 밥맛이 특히 좋아 옛날부터 나라 임금에게 올리는 진상미로서도 유명 했다. 자채는 또 음력 7월이면 수확을 거두게 되는 올벼로서 보릿고개를 어렵게 넘기고 나서 모처럼 거군 자채쌀로 밥을 지어 포식을 하고는 배탈이 났었다는 이야기는 지금도 노인들에게 흔히 들을 수 있는데, 파종과 김매기 등  재배방법이 매우 까다로워 다른 곳에서 온 농부들은 재배법을 익히기에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고도 한다. [광주분원 사기방아, 여주 이천 자채방아]라는 민요의 구절까지 생길 정도로 유명했던 이천의 자채쌀은 그 후 일제시대에 와서 다수확 신품종의 벼들이 보급되면서 차츰 자취를 감추다가, 10여 년 전 대월면 장록리에 있는 지정농가에서 겨우 명맥을 이어오던 것 마저 정부의 신품종 장려정책에 밀려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자채벼가 사라지게 된 데에는 재배법이 까다롭고 수확량이 신통치 않았다는데 그 원인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도 이 고장에서 나오는 쌀은 가장 좋은 품질의 것으로 평가되어 쌀의 명산지로서의 이름을 여전히 누리고 있다.


그러면 이천 쌀이 이렇게 유명해 진 이유는 무엇일까? 단지 천혜의 자연환경 덕분이었을까?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서 우리는 과거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때는 성종 21년 (1490)윤 9월 13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세종(世宗)의 손자인 성종(成宗)은 할아버지세종의 능(陵)을 성묘하기 위해 여주 행차길에 오른다. 그 행차길에 임금의 수레인 어가(御街)가 이천부(利川付)의 고을을 지날 적에 그 지방 교생(校生)들이 길 왼쪽에서 국궁하여 맞이하자 왕이 고을의 부사(府使)인 복승정(卜承貞)에게 부학(府學)에 나오는 유생들 56명에게 환궁할 때 시험을 보게 하여 이 고을로 하여금 영광됨을 알게 할 것이라는 전교를 취한다.

다음날 어가가 여주의 대교천에 이르렀는데 큰비와 뇌성과 번개가 치더니 한참 뒤에 멈추었다. 여주의 파오달에 이르러서 왕이 제사 행할 때 뇌성과 비가 너무 심하여 만약 며칠을 두고 개이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매우 걱정이 되어 정승에게 물으니 가을비가 며칠 씩 계속 오지는 않을 것이니 때를 기다렸다가 제사를 행하는 것이 옳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만약 내일 개이지 않으면 친제(親祭)를 지내지 못할 것이니, 이 사유(事由)를 관원을 보내어 고하고, 2-3일 머물면서 날이 개이기를 기다려 친히 제사하고 돌아가고 임금이 장수, 군졸, 백성을 모아 임금이 주관하여 사냥하며 무예를 닦는 일인 강무(講武)는 정지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왕은 때 아닌 뇌성과 비를 만나 마음이 편치 못하고 매우 걱정이 되었다.

더욱이 많은 사람을 동원하여 며칠을 묵게 되어 경기의 백성들이 괴로울 것이 매우 염려되었다. 그래서 승정원에게, 각 고을의 왕이 지나며 자는 곳에 임어(臨御)하는 것을 개의치 말고 사람들로 하여금 옛날 같이 머물러 살게 하라고 지시 하였다. 그리고 제사를 행한 후에 마땅히 긍휼의 은전을 행할 것을 약속 하였다. 그리고 이 고을의 유생을 다음날 시험하기로 하였다.

다음날인 성종 21년 9월15일. 임금이 영릉(英陵)에 나아가 제사하였다. 어제 뇌성과 비가 대단하여 제사를 행하지 못할까봐 염려하였는데 다행히 그쳐 제사를 지내게 되어 매우 기뻐하며 제사의 집사관들에게 1자급을 더하는 것으로 마음을 표하고자 하였다. 또한 이천을 지나다가 보았던 그 고을의 교생을 여기서 다시 보게 되어 시험을 행하여 향리로 하여금 영광됨을 알게 하려고 하였다. 또 향교에는 물품을 내려 학비에 보태도록 하고 경기의 백성들에게는 전지의 조세를 감하고자 하는 뜻을 정승들에게 알렸다.

임금이 청심루(淸心樓)에 나아가 술자리를 베풀고 어가를 따라온 재상 2품 이상을 인견하며 말하기를 “이 지방 강산이 가장 좋으니 만약 어진 수령이 아니면 반드시 유람에 빠져 백성의 일에는 마음을 안 두니 잘 선택할 것”을 명하였다.


환궁 하던 길에 여주 유생(儒生)을 시험하여 3인을 뽑아 생원(生員)으로 삼았다.

왕이 에게 전지하기를 영능(英陵)을 배알하고 여러 고을을 순수해 살피니 경기의 백성들이 모두 그 폐단을 받았으나 어가가 머문 땅에는 노고와 소비가 더욱 많았으니 사리로 보아 마땅히 넉넉하게 돌보아야 할 것이라 하며 여주, 이천, 양지, 용인, 광주의 인민들에게는 금년의 전조를 절반으로 감하고, 여주, 이천, 향교에 각각 30석의 쌀을, 용인 향교에는 20석을 내려줄 것을 전하였다. 또한 사조(史曺)에게는 다행히 제사를 지낸 것이 매우 기쁠 뿐만 아니라 제사에 배종(陪從)한 자에게도 또한 감사해야 한 은전(恩典)을 두루 미치게 할 수 없으므로 그 집사관에게 각각 한 자급을 더하게 하라고 하였다.

여주 파오달에서 유숙을 하고 다음 날인 16일에 왕이 어가를 돌려 여주 대교천위에 이르자 임금이 올 때에 전에 말을 바치겠다고 한 백성에게 옷을 주어 포상하게 하였고 이천 유생을 시험하여 서윤공을 뽑아 생원을 삼았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17일, 큰비가 내렸다. 때가 벌서 초겨울인지라 차가운 눈비로 변하고 말았다, 환궁하는 어가행렬이 또다시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왕이 길가에 많은 동상자가 있는 것을 보고 선전관으로 하여금 술을 가지고 가서 구하게 하였다. 어가가 용인 파오달에 이르자 사헌부 지평 홍한. 사간원 정언 유빈이 아뢰기를 “지금 들으니 명월에 타위(打圍)를 하고자 하신다 하나 신은 길 위에 죽어있는 말과 또 사람도 동상으로 사경에 이를 자가 있는 것을 봤는데 만일 내일 타위를 행하고자 하면 사람과 말의 사상이 반드시 많을 것이니 군사와 말을 쉬게 하고 명일 후에 타위하도록 하소서” 하니 왕이 이를 옳게 여겼다.

그리고 선전관(宣傳官)을 좌우상(左右廂)에 나누어 보내어 사람과 말의 사상 현황과 취중의 낙후 여부를 살펴보고 오도록 하였다. 그리고 군사들의 비에 젖은 상황과 동상에 걸린 자를 살펴보게 하고 술을 먹여 구하게 하였다.

큰비가 종일 내렸다. 임금이 비옷을 입고 갔는데 길은 멀고 진흙 속에 빠져 인마가 모두 얼고 젖어 사상자가 많았다.

이때 이천부사로 선정(善政)을 베풀고 있던 복승정은 이천부에서 유숙하고 있는 지친 군졸과 어가행렬을 수행하는 여러 문무백관들에게 올해 수확한 이천쌀로 밥을 지어 먹이게 되는데 그 밥맛이 꿀맛과도 같았으며, 군사들은 곧 기력을 회복하게 되었다.

이에 이천 쌀은 성종 대왕의 성묘 길을 수행했던 수많은 문무백관과 수백 명의 군사들의 입을 통해 그 명성이 회자되었고 왕이 환궁 하자마자 이천쌀은 곧 진상미로 올리게 되었으며 이천주민에게는 조세의 절반을 감하는 은전이 내려졌다. 그리고 고을주민들은 수령인 복승정을 친어버이 이상으로 존경하고 따랐다. 당시 이천부사였던 복승정의 선정에 대한 고을주민들의 존경심은 上疏文을 통해 조정에까지 전해지게 되는 데 이때의 상황을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성종24년 1월 23일, 이천부사 복승정이 임기가 만료되어 고을을 떠나게 되었는데 고을사람들이 상소문을 올려 유임하기를 청하였다. 상소문을 면밀히 검토한 성종은 대신들을 불러 처리방안을 숙의케 한다.

이에 대신들이 논의하기를 “신등은 복승정의 사람됨을 상세히 알지 못하나, 만약 고을을 잘 다스렸다면 포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라고 건의한다. 이미 여주 능묘 행차 길에 큰 은혜를 입은데다 이천부사 복승정의 선정(善政)을 알고 있던 터라 대신들의 논의는 신속히 진행되었다.

그러나 성종 임금의 대응은 보다 신중했다. 전교하기를 “근래에 고을을 잘 다스린 자는 과연 모두 포장해야 한다고 한다. 이제 내가 의논하는 까닭은 여러 사람들의 중론(衆論)을 듣고서 포장하고자 하는 것이지 이천고을 백성들의 말만 듣고 복승정을 유임(留任)시키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

이미 성종임금은 복승정의 유임을 결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조정을 떠들썩하게 했던 복승정은 과연 어떤 인물일까? 그는 이천부사로 부임하기 전 광흥창 수(廣興倉 守)(4품직)의 관직에 있었다. 광흥창이라 함은 농사를 관장하는 일을 담당하는 관직으로 이 관직의 수령이었다. 함은 이미 복승정이 농사에 관해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그의 조부였던 복한에 관한 실록의 기록을 살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세종 조에 전 장령이었던 복한의 진언들을 살펴보면 “농번기를 당하여 수령을 교대하면 가는 자를 보내고 오는 자를 맞아들이는 데에 농사가 때를 넘길 염려가 있으니 지금부터는 수령이 비록 임기가 찼다 하더라도 만일 농번기를 당했거든 교대시키지 말고, 3월부터 6월까지는 체직하지 말자.”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런 기록에서처럼 얼마나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생각을 했었는지를 알 수 가 있다. 그리고 그런 정신들이 그의 손자인 복승정에게 까지도 이어졌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또한 복승정에 관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은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시사해 준다. 우선 복승정에 대해서 성종 임금이 대단한 신뢰감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복승정은 이천부사에 부임하기 전에 성종으로부터 효행(孝行)사실로 포장을 받았고 관직에 들어서도 문장이 뛰어나 예문관 검열 등 문한의 직을 성실히 수행하였으며 사간원 정언, 사헌부지평등 대간의 직에 오랫동안 있으면서도 시류에 영합하지 않고 정론(正論)을 펼쳐 조정대신들은 물론 성종 임금도 복승정의 성품을 익히 잘 알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때마침 이천부사 복승정의 유임을 요청하는 고을 주민들의 연명상소가 올라온 것이다.

이때 성종은 이천부사 복승정을 목민관의 표상으로 삼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사실은 당시 주민들의 상소와 조정대신들의 재청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경기관찰사 이계동에게 하서하기를 “도내 수령이 현명한지의 여부는 경이 아는 바이니, 이천 부사 복승정의 다스린 공적을 갖추고 기록하여서 아뢰도록 하라.”하였다. 라고 기술하고 있는 실록기사를 통해 확인된다.

훗날 무려 10년간이나 병조판서를  역임하여 조선 역사상 최 장수기록을 갖고 있는 이계동은 사흘 후 직접 도성에 올라가 임금께 아뢰기를 “이천부사 복승정은 농사를 권장하는 데 부지런하여 밭 갈고 씨 뿌리는 것이 농사철을 어기지 않았고 또 창고를 수리하는데도 백성들이 수고로움을 알지 못했다고 하니 이 사람은 바로 성실한 자입니다.”하니 임금이 승정원에 전교하기를 “만약 이와 같으면 진실로 권장함이 마땅하고, 다음 정사(政社)에 다시 아뢰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지방 수령의 재임을 두고 관찰사와 임금이 독대하여 공론화시킨 이러한 사례는 조선 500년 역사상 전무한 사실로 확인된다. 이처럼 민(民)의 입장에 서서 목민관의 올바른 길을 몸소 실천했던 이천부사 복승정의 선정(善政)사실과 과학영농의 효시를 열었던 그의 안목은 실사구시(實事求是)를 통해 조선 봉건왕조를 재건하고자 했던 유형원, 정약용과 같은 조선후기 실학자들과 맥을 함께 하는 것으로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이천 쌀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우수한 품질의 쌀이라는 명성을 얻기까지는, 이천지방이 농사짓기에 적합한 토질과 천혜의 자연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과학영농을 통해 쌀의 질을 좋게 하여 급기야 진상미로 올릴 수 있도록 했던 이천부사 복승정과 이천고을 주민들의 관민일체의 대동정신(大同精神) 때문이었으며 이러한 정신은 새 천년을 맞이하고 있는 지금 새롭게 평가되어야 한다.


연세대학교 사회발전연구소 국학연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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