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2월의 독립운동가 구연영

아침햇쌀 2014. 1. 25. 13:36

을미의병의 쾌거, 구국계몽운동으로 꽃피우다

국가보훈처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구연영 선생을 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선생은 경기도연합의진 이천수창의소를 결성하여 중군장으로 활동하며 백현전투에서 일본군을 섬멸하였다. 이후 구국회를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역설하다 아들과 함께 순국하였다.

 

선생은 1864년 6월 20일 구철조의 3남으로 서울에서 출생했다. 선생의 집안은 대대로 경기도 광주군 실촌 지역에 세거해온 유력 가문으로 엄격한 충효정신의 바탕 위에 충군애국사상을 배양할 수 있었다.

 

1895년 일제에 의해 자행된 을미사변과 단발령은 우리 민족의 공분을 불러 일으켜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해 항일투쟁을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선생이 참여한 남한산성의진(이천수창의소)은 전국에서 가장 먼저 편성되어 군사적 요충지인 남한산성을 한달 이상 점거하여 서울 진공을 눈앞에 두었을 정도로 성세를 크게 떨쳤다. 선생은 의진의 중군장이 되어 1896년 1월 18일 백현(이천 널고개)전투를 압승으로로 이끌었다. 을미의병의 쾌거였다.

 

이후 원주 방면으로 이동하여 수백 명의 군사를 모은 선생은 같은해 2월 25일 광주 이현에서 다시 모여 포군과 민병을 규합하고 광주의병과 연합하여 남한산성을 점거하였다. 선생은 이 수성전에서 중군장으로 의진의 본부가 있는 중앙을 맡아 지켰으며 관군의 공격으로 해산되기까지 한 달 동안 관군과 대치하여 여러 차례 전투를 치루었다.

 

선생은 남한산성에서 해산한 후 김하락을 의병장으로 추대하여 영남지방을 향해 내려갔다. 여주, 제천, 단양, 풍기, 순흥을 거쳐 안동에 이르러 영남의병과의 연합항전 방략을 논의하기도 하였다. 1896년 5월 한 달 동안 청송 감은리, 의성 수정사 등에서 수차에 걸쳐 관군을 상대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1895년 시해 당한 명성황후의 장례식.

이때부터 을미 의병 항쟁의 불길이 조선인의 가슴에 불타오르고 있었다.

 

1896년 여름, 고향으로 돌아온 선생은 광주군 도척면 노곡리에 정착한 뒤 기독교에 투신하여 새로운 구국투쟁의 길을 모색하게 되었다. 선생은 1899년 이천 덕들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1902년 지역교회를 관리하는 권사가 되었으며, 기독교 신앙을 구국투쟁으로 승화시키기 위하여 이천에서 ‘구국회’라는 애국단체를 결성하였다. 이후 선생은 이천, 광주, 여주 등지를 돌면서 구국회를 기반으로 군중집회를 통해 일진회의 반민족 매국행위를 성토하는 등 구국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였다.

 

선생의 이러한 활동에는 애국단체 보안회와 대한자강회에 가입하여 활동하고 있던 장남인 구정서의 조력과 역할이 컸다. 그러나 선생은 일진회원의 밀고로 출동한 일본군에 의해 장남 구정서와 함께 체포되어, 1907년 8월 24일 부자가 동시에 순국하였다.

 

선생은 일제침략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온 몸을 던져 구국투쟁을 전개한 인물이었다. 먼저 의병에 투신하여 무장투쟁을 전개하였고, 이후 기독교를 수용하여 대중구국투쟁을 전개하다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1963년 선생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