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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랑스러운 한국인이다

아침햇쌀 2009. 10. 6. 11:27

일본에서 귀화한 다문화가정 수기

나는 자랑스러운 한국인이다

                                                           나 현지

  나는 경기도 이천에서 다문화가정을 이루고 사는 일본 이름으로는 다께다니 나오꼬(竹谷直子), 한국 이름은 나현지(羅炫祉)다. 1988년에 현재의 남편과 결혼하여 1998년에 한국 국적으로 귀화했으며 올해가 한국으로 온 지 21년이 되는 해 이기도 한다.

  현재 경기도 이천시청 문화관광과에서 계약직공무원(통역사)으로 근무하며 시댁은 강원도 영월이며 홀로된 시어머니와 남편 그리고 딸 넷에 아들 하나 5남매를 둔 맏며느리다.

 흔히들 한국과 일본은 “가까우면서도 먼 나라”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하는데, 아마도 양 국의 얽히고 설힌 슬픈 역사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시대 흐름에 따라 양 국의 관계는 이제 한쪽 문화를 일방적으로 수용하거나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한류, 일류라는 개념으로 서로에게 도움을 주는 상생의 관계로 변모하는 시대 이기도 한다.

  나의 한국생활 20여년은 참으로 길고도 먼 세월이지만 지금의 나를 더욱 성숙하게 만들어주기도 하였다. 특히 5남매를 낳은 나를 사람들은 주저없이 “애국자”로 부른다. 나는 아이들에게 늘 당당한 모습을 보여 주고 싶고 아이들도 이런 엄마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 같다. 친구들 사이에서는 엄마가 일본인이란 것이 흠이 아니라 선망의 대상이라고 한다. 우리 아이들이 집에서 일본 음식을 먹고 일본어도 배우며 일본 문화를 쉽게 접할 수 있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이지만 친구들 보기에는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다는 것이다.

  나에게는 한국과 일본의 국경이 없으며 대한민국을 제2의 조국으로 가슴에 담아 살고 있다. 일본은 세계적 물질문명이 결실된 나라라 할 수 있으며, 한국은 심정적 가족주의 나라이며 세계적 정신문화가 결실된 나라라고 생각한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대한민국”을 뜨겁게 외치던 응원소리는 한민족의 정신문화다. 2007년 12월에 서해안 원유 유출사고가 일어났을 때, 많은 국민들이 다니던 직장에 휴가를 내고도 자원봉사를 하려고 몰려드는 그 뜨거운 열정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애국심이 굉장히 강한 민족이며 사람에 대한 정이 또한 두터운 민족이라고 생각한다. 어린 아이들까지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노래를 외치는 그 모습을 볼 때마다 내 가슴에 와 닿는다. 나는 제2의 조국 대한민국을 사랑한다. 이 나라 국민으로 살아가는 것이 자랑스럽고 뜨겁게 달아오르는 열정적인 매력에 푹 빠져 살고 있다.

  현재의 나의 모습을 보고 주위에서는 한국 사람 보다 더 한국스럽다고 하는데, 실제 한국생활 초기에는 너무나 다른 문화적 이질감에 빠져 적응을 하지 못 하여 피와 눈물이 나는 노력을 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이국 땅 한국에 시집와서 시어머니와 남편, 5남매의 가족들과 함께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요즘은 시대가 변하여 타국에서 와서 정착해 사는 직장인들이나 노동자들이 늘었고 결혼해서 사는 다문화가정들이 증가하는 추세로 100만명 이상의 외국인들이 살고 있다고 한다. 사람은 국적이 어디든간에 다 같은 사람임에도 사람들은 서로 다른 관점에서 편견과 선입견, 심지어는 차별심까지 갖고 있다.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며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타국 사람들을 차별하거나 깔보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말로는 국제화시대니 글로벌시대라고 외치면서도 아직 마음에서는 받아들이지 못 하는게 현실이다. 그러니 타국에서 온 사람들의 삶은 어떠할까? 태어난 곳과 전혀 다른 문화와 환경 속에서 적응해서 산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나는 그들의 느끼는 서러움과 외로움, 수모, 고통 등 그 심리 하나 하나를 손바닥 보듯이 이해한다. 언어와 문화, 정서, 습관, 풍습 등이 전혀 다른 환경에서 사는 자체만이라도 소외감을 느끼고 말 못하는 사연이 얼마나 많은데, 게다가 그것을 이해 못 하는 사회와 더불어 산다는 것은 그들을 더욱 곤란하게 만들고 만다. 그들을 진정으로 이해하려면 타국 문화를 접해 보거나 그들의 생활을 체험해 봐야만이 조금이나마 이해심이 생길 것이다. 사람의 의식 자체는 쉽게 변화될 수 없지만 다문화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의식변화가 있기를 진심으로 간절하게 바란다.

  내가 처음 한국에 관심을 갖게 된 동기는 일본에서 대학교를 다닐 때 TV에서 일제시대를 다룬 특집 다큐먼터리를 본 것이 계기가 되었다. 한민족을 말살통치하며 인적, 물적, 자원을 약탈한 내용들을 칠탈(七奪)이란 말로 표현하며 실제 빼앗은 일곱 가지를 구체적인 기록물(영상)로 보여 준 것이었다. 나는 20세가 될 때까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해서 수탈했던 36년 일제시대 역사에 대해 전혀 모르고 살아왔다. 그 때 처음으로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나에게는 그 사건이 내 인생의 가치관과 고정관념을 순간적으로 무너트릴 정도의 큰 충격 그 자체였다. 특히 종군위안부의 실태는 나에게 너무나도 충격적이었고 그 다큐먼터리를 보고나서 3일간 밥을 넘기지 못 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일제 36년간의 다큐먼터리를 보기 전까지는 한국과 한국 사람에 대한 심한 편견과 차별심을 갖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부모님도 주변의 어른들까지 다 싫어하니까 따라서 싫어했을 뿐이었지, 확실한 이유는 없었다. 그날 나는 방송을 통해서 내가 지금까지 잘못 알고 있었던 역사적 사실들을 깨닫게 됨으로써 한국에 대한 시각과 의식이 달라지게 되었다. 한국의 역사와 종교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접하게 되었고 한국이란 나라가 얼마나 휼륭한 나라인가를 알게 되었고 또한 알면 알수록 점점 그 매력에 빠져버렸다. 내 마음은 한국에 가서 살고 싶어졌고 한국을 그리워하게 되었다.

  내가 21년전에 한국에 가겠다고 결심했을 때에 나에게 확실한 꿈과 목표가 있었다. “한국과 일본의 가교 역할을 하겠다”는 목표였다. 내가 아닌 내 영혼의 부르짖음이며 한국에 가고 싶고 한국에서 살고 싶어서 피가 끓는 정도였다. 당시 일본 가족과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 했다. 나 혼자 외롭게 해협을 건너서 한국에 왔다. 나는 일본에서 딸만 셋을 둔 가정의 막내로 태어나 부모님 사랑과 기대를 온 몸에 받으며 자랐다. 어릴 때부터 효심이 지극했던 나는 부모님 반대를 뿌리치는데 마음이 제일 아팠다. 언젠가 친정 부모님께서 나를 이해하여 내 선택이 잘 했다는 날이 올거라는 신념이 있었다. 온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국에 가겠다고 하던 당시, 나에게 그런 용기가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지만 확고한 신념을 갖고 한국 땅을 밟고 말았다. 한국과 한국 사람들을 가장 멸시했던 장본인인 내가 한국에 시집을 갈 정도로 변한 것이 아마도 기적 같은 일이다.

  나는 1988년에 한국인 남편과 결혼도 했다. 시댁은 강원도 영월의 종가집으로 남편은 7남매의 장남이다. 손위 시누이가 둘, 손아래 시누이 둘, 시동생 둘인 집안의 맏며느리다. 내가 한국에 왔을 때 한국말을 제대로 못 했지만 당시 시아버님께서 처음 나를 보자마자 마음에 들어하셨다고 한다. 시부모님께서 일본 며느리를 아마 많이 미워하실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실제로는 정반대였다. 시어머님께서 처음에는 종가집의 맏며느리가 말도 제대로 못 하고 해서 많이 불안해하셨다고 한다. 그러나 시아버님께서 “우리 며느리는 똑똑하니까 말 정도는 금방 배울거다.” 하시며 “우수한 후손들이 태어나는 것 보다 더 이상 바랄게 뭐가 있겠는가. 걱정하지 말라”고 시어머님을 다독거리셨다고 한다. 시아버님께서는 교양이 있으시고 선견지명이 있으신 분이셨다.

  1988년 당시 시아버님께서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사무소에서 국제결혼 혼인신고를 하시려는데, 아무도 방법을 몰라서 며칠간 군청 등 사방으로 알아보고 간신히 처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영월에서는 국제결혼 첫 사례인 것이다.

  결혼 후 처음 시댁에 갔을 때 기절할 뻔했다. 시댁 마을의 생활수준은 상상을 초월한 수준으로, 내가 일본에서 살아왔던 생활환경과는 40년 이상의 문화 차이를 느꼈다. 화장실은 재래식에 큰 통에 나무판자를 걸친 것이고 빨래는 집에서 하는게 아니고 냇가에 나가서 하며 부엌에는 수돗물이 없고 바람이 숭숭 불어 들어오는 재래식이었다. 친정어머니가 유년시절에 이런 환경에서 사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였으며 그 때까지 비교적 유복한 환경에서 살아왔던 나에게 문화 차이는 매우 컸었고 컬처 쇼크를 받기까지 하였다.

  당시 남편 직장이 경남 창원이어서 처음에는 창원에서 살다가 남편과 함께 일본에 잠시 들어가 살다가 시댁인 강원도 영월로 돌아왔다. 1991년 11월에 첫아기를 낳았다. 자연분만으로 몸무게가 4.5킬로의 예쁜 딸을 낳았다. 시어머님께서 나에게 수고했다고 하시면서도 딸 낳았다고 서운해하셨다. 딸 이름을 어떻게 지울까 고민하고 있는데, 시어머님께서 나에게 “애미는 몸이 허약한데 이번에 딸 낳았으니까 다음엔 꼭 아들을 낳으면 돼. 그러니 아기 이름에 사내 남(男)을 넣어야지. 안 넣으면 안 된다”고 까지 하셨다. 그래서 첫 딸 이름을 김희남(金希男)이라고 지었다. 처음 태어난 내 딸에게 남자 이름을 지어주는 것이 정말 마음이 아프고 싫었지만 시어머님께 거스르지 않으려고 하자고 하시는대로 이름을 지었다. 너무 강권하시니까 따를 수 밖에 없었지만 너무 속상하고 가슴 아파 눈물만 나왔다. 딸을 낳은 것이 무슨 죄인가 정말 서운했다. 나는 시어머님께서 아들을 원하신다는 것을 그 때 확실히 알게 되었고 그 때 처음으로 한국에는 남아선호사상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본에서는 아들과 딸을 전혀 구별하지 않고 오히려 딸을 좋아하는데, 같은 동양인데도 한국과 일본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일단 첫 딸 이름을 희남이로 출생신고를 하고나서 나중에 시어머님께 며느리로서 인정 받고나면 잘 말씀드려 희남이 이름을 법적으로 개명해 주겠다고 다짐을 했다. 실제 희남이 이름은 초등학교 들어가서 사내 남(男)을 남녘 남(南), 김희남(金希南)으로 개명을 하자고 시어머님께 말씀을 드렸더니 어머님께서 그 때서야 “애미야 미안하다. 내가 무식해서… 네 마음대로 하라”고 하셨을 정도다.

  신혼초에는 강원도 영월의 시댁에서 시부모님을 모시며 당시 고등학생이던 막내아가씨와 같이 살았다. 농사를 짓는 집인데도 시아버님께서는 나에게 농사일을 안 시키셨다. 시아버님께서는 평소 말씀도 별로 없으시고 약간은 권위적이신 가부장인 분이셨기에 이런 한국문화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시댁의 식구들과 원만하게 잘 지내려고 많은 노력을 했고 나와 10살 차이인 막내 아가씨가 마음적으로 많이 도와 줘서 견딜 수 있었다.

  ‘94년 1월에 둘째 딸 낳고도 산골 농촌에서의 생활은 외로웠다. 시부모님이 계시고 남편이 곁에 있지만 소통되지 않는 일들이 너무나 많아 외로웠다. 아이들이 잠이 들면 가끔 집 앞에 앉아서 산골의 밤하늘을 보며 별을 세기도 했다. 일본에서 봤던 별과 여기서 보는 별이 똑같은데, “나는 왜 여기에 있을까, 무슨 인연으로 강원도 산골에 있을까”하는 생각을 하며 남몰래 눈물도 많이 흘렸다.

  시어머님께서는 내가 아이들을 훈육하는 방법에 대해 못마땅하게 여기셨다. 아이들에게 매를 들지 않고 키우면 버르장머리 없게 키우는거라고 어머님께서 불만을 터뜨린 적이 있었다. 나는 말로 아이들을 가리키는 스타일인데, 시어머님께서는 아이들이 말을 안 들으면 매로 때려서 가르쳐야 한다고 하셨다. 나와 시어머니 사이에는 아이들 양육방법에도 문화차이와 가치관의 차이가 있어 한때는 혼란스러웠다. 어릴 때는 부모님한테 맞아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막내 아가씨가 “엄마! 새 언니는 아이들을 교육적으로 잘 키우는 것 같다”고 말한 후부터 어머님께서 내 아이들 교육방법에 대해 이해를 하신 것인지 아이들 양육방법에 대한 마찰은 사라졌다. 시댁 식구와 화목하게 잘 지냄으로서 고부간의 오해도 자연스럽게 원만하게 넘어갈 수 있는 것 같다.

  둘째 딸이 첫 돌을 지나면서 나는 경제활동을 시작했다. 일본어 강사로서 대학교나 기관 등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게 되었고, 지금까지 5남매를 낳아 키우면서도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96년 2월에 셋째를 낳았는데, 또 딸이었다. 영월에서 딸만 셋을 데리고 다니면 지나가는 어르신들이 꼭 하시는 말씀이 “희남이 엄마! 아들을 낳아야지”가 인사말이었다.

  ‘96년초 부터 병석에 누워 계셨던 시어버님께서 그 해 11월에 위암으로 64세의 연세로 돌아가셨다. 내가 바쁘게 일하느라 시아버님 병구완을 충분히 못 해 드렸음에도 시아버님께서는 돌아가시기 직전에 나에게 “고맙다”고 한 마디 하셨다. 그 때 처음으로 우리 나라 장례식을 경험했다. 시어버님께서 돌아가신 후에야 나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셨는가를 알게 되었다.

  인생을 살다보면 평탄한 길 보다 가시밭길이 더 많기 마련이다. ‘97년에 남편이 직장관계로 경기도 이천으로 옮겨가게 되어서 우리 가족이 떨어져 살았다. ‘97년에서 ‘98년에 IMF로 인하여 큰 경제위기를 겪었을 때, 남편도 가까운 지인으로부터 사기를 당한 일이 있었다. 그 여파로 인해 나는 한국 국적 취득을 강요 당하여 결국 귀화를 하게 되었다. 그 때 내가 귀화를 한 것은 자발적인 의사가 아니었다. 남편이 사기를 당해서 반 강제적으로 바라지 않는 귀화를 하게 된 셈이다. 당시 넷째를 임신했을 때라 너무 서러워서 많이 울었다. “국적”이라함은 출생지로 조국과 고향, 부모님, 가족, 핏줄 등 모든 배경이 담겨져 있는 귀중한 것이다. 결코 쉽게 포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본인 의사에 의해 자발적으로 귀화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내가 “귀화”를 마음으로부터 받아들일 때까지는 5년 이상의 세월이 걸렸다. 어떤 이유와 배경이든 간에 귀화를 하게 된 만큼 나는 긍정적이며 발전적으로 생각하도록 무단히 노력했다.

  ‘98년 4월에 강원도에서 경기도 이천으로 이사 가는 날에 넷째를 낳았는데, 또 딸이었다. 이사 도중에 진통이 와서 병원에 가서 낳았는데 딸이어서 혼자 침대 위에서 울고 또 울었다. 옆 침대에 제왕절개 수술로 출산한 아주머니는 내 눈물의 의미를 몰라서 왜 우는냐고 물었다. 자연분만으로 출산하여 바로 앉아서 식사하는 나를 보고 그 아줌마는 부러워할 뿐인데…  내 서러운 마음을 어찌 알까…  인생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며 이 세상에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나무도 많다는 것을 그 때 생각하게 되었다.

  출산 후 얼마 안 돼서 또 임신이 됐다. “또 딸이면 어떻게 해…” 불안한 마음에 별의 별 생각을 다하게 되었다. 또 딸이면 양녀로 보낼까 말까하는 고민까지 했다. 당시 선배 가정을 찾아가서 상담을 하기도 했다. 선배께서는 양녀를 보낸다는 생각을 하지 말고 무슨 일이 있어도 아기를 낳아 휼륭하게 잘 키우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에 힘을 얻어 아들이든 딸이든 낳아서 내 손으로 잘 키우겠다고 다짐했다. 임신 8개월 때 병원에 가서 주뼛주뼛 검사를 받고나서 이번이 다섯 째라고 하니까 의사 선생님께서 초음파검사 후에 “오래 기다리신 보람이 있으십니다.”고 말씀하셨다. 아들인 것 같다는 직감에 어느덧 불안감은 사라지고 감격의 눈물까지 흘렸다.

  ‘99년 7월에 다섯 째를 낳았다. 드디어 아들이었다. 결혼 11년만에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들을 낳았다.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이 최고의 기분이었고 정말로 행복했다. 시어머님께서도 아주 좋아하셨고, 남편도 기분이 아주 좋아보였다. 나도 아들을 낳아보니까 내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것 같고 맏며느리로서의 자리를 제대로 찾은 것 같았다. 

  요즘 시대가 변해 아들딸을 구분하지 않고 딸을 더 선호하는 등 시대가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아직까지는 남아선호 사상의 뿌리가 깊은 편이다. 나도 결혼하기 전에 아이를 다섯 낳을 거라는 솔직히 상상도 못 해 봤다. 결혼 후 딸을 계속 낳고 주변에서 “아들을 낳아야지…”란 말을 10년동안 들으면서 살다보니까 나도 모르게 문화에 적응하여 종가집 대를 잇겠다는 책임감이 생긴 것 같다. 게다가 어느 새 나에게도 욕심이 생긴 것이다. 목욕탕에서 부자가 서로 등을 밀어주는 모습이 그렇게 부러워서 남편에게 아들을 안게 해 주고 싶어졌다. 하늘은 내 바람을 들어주셨다. 정말 우리에게 보석 같이 귀한 아이들을 다섯이나 주셨다.

  2002년 7월에 친정아빠가 심장마비로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친정 큰 언니한테받았다. 정말 믿기지가 않았다. 돌아가시기 두 달전인 5월초 일본 아리따에 출장 갔을 때 내 연락을 받고 아빠가 그곳까지 찾아오셨는데, 그 때 본 모습이 마지막이라니 다음 날 울면서 비행기 타고 달려갔다.

  장례식에 가니 친척들이 나를 보고 반가워하시며 “지금 어디서 사냐, 무슨 일을 하냐”고 물었다. 나는 “한국에서 살고 있고 아이들을 다섯이나 낳았으며 이천시청에서 근무하고 있다 …” 라고 답하는데, 보는 사람마다 한결같이 물어보는 것이다. 나는 왜 그러는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까 친정 부모님께서 내가 한국에 시집갔다는 사실을 숨기고 살아오셨다는 것이다. 부모님께서 가장 기대했던 막내딸이 한국으로 시집을 간 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지금까지 숨기고 싶은 만큼 가문의 수치로 여기셨던 것이다.

  ‘88년에 결혼해서 아빠가 돌아가실 때까지 나는 부모님께 가끔 편지나 전화를 하며 안부 정도나 물으면서 살아왔다. 남편과 인사하러 한 번, 아이들을 데리고 한 번 친정에 다녀간 적이 전부였던 것이다. 당시에는 아무리 내가 진실하게 부모님께 다가가려고 해도 부모님께서 마음의 문을 닫으시고 나를 받아주려고 하지 않으셨다. 부모님께서는 딸을 빼앗겼다는 생각과 나에 대한 배신감 등으로 한이 맺혀서 남들에게 말도 못 하는 고통스러운 세월을 보내오신 것이다. 나는 친정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아프고 혼자 눈물을 흘린 적이 많았다. 친정언니 둘은 부모님 보다 더 했다. 15년간 아무 연락도 없이 무소식으로 막내동생은 행방불명이 되었다며 숨기고 거의 단절하며 살아왔다. 그런 큰 언니가 갑자기 전화해서 “아빠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해 주니 깜짝 놀랄 수 밖에…  지금까지 친정 식구들은 내 행방을 감추고 더욱이 나 때문에 숨을 제대로 쉬지 못 하며 살아왔다는 사실을 알았을 땐 너무 충격적이었다.

  나는 아빠 장례식에 모인 친척들에게 지금까지 살아온 과정과 현재 생활에 대해서 당당히 밝혔다. 친척들은 유년시절부터 나를 봐서 내 성품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전혀 몰랐던 사실을 나한테 직접 듣게 되니 놀라움과 동시에 미스터리가 풀렸다고 했다. 친척들은 아빠의 죽음에 대한 슬픔 보다 갑자기 나타난 조카딸의 쌓인 이야기를 더 경청해 주었다. 그 때 시기적으로 2002년에 한일 월드컵에서 우리 나라가 4강이 드는 기적을 이룬 직후라서 그런지 한국에 대한 이미지는 최고조에 도달했을 때였다. 한국에서 돌아왔다는 자체만이라도 스타가 된 것 같이 열기가 식지 않을 때였다.

  만약 아빠가 돌아기시기 전에 일본 출장 때 아리따에서 아빠를 뵙지 못 했다면 나는 아마도 평생 후회하며 살 뻔했다. 아리따 호텔까지 아빠가 찾아오셔서 같이 방을 쓰면서 옛 이야기를 나누며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아빠! 엄마 아빠가 나 때문에 마음 고생을 많이 하셨지만 나도 더 괴롭고 힘들었어. 아빠! 나를 용서해 줘…” 아빠께서는 “하루도 너를 잊은 순간이 없었다. 언젠가 네가 집에 돌아올 거라고 기다렸다.” 하시면서 “이제 괜찮다. 용서하마…” 우리는 서로 끌어안고 엉엉 울었다. 그 다음 날에 아빠와 나는 팔짱을 끼고 관광지를 함께 다녔는데, 그것이 아빠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에 일본 가족은 이제 자연스럽게 서로 오고가며 전화도 자주 하게 되었다. 그 모습을 보고 외삼촌께서는 “아빠는 가장 사랑하는 막내딸을 위해서 목숨을 바쳐서 가족관계를 회복시키셨다”고 표현을 하신 적이 있다.

  “세월이 약”이란 말이 있지만 일본 가족과 친척들이 한국에 대한 인식이 많이 바뀌었다. 내가 우리 나라의 매력에 빠져 반한 것 처럼 일본 가족과 친척들도 우리 나라의 매력과 끈끈한 ‘정’에 반해 버린 것이다. 이제는 친정 식구들도 나를 지극히 자랑스럽게 여기며 입만 열면 나를 칭찬하게 되었다. 또한 내 주변의 사람들도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한국에 와서 성공했다”는 말이다.   

  나는 경기도 이천시청에서 일본과의 국제교류업무에 종사한지 9년이 된다. 나는 양 국민의 문화와 정서를 누구보다 잘 알기에 그간의 다양한 경험과 노하우를 업무에 반영시키며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음으로 이 업무에 보람을 많이 느끼며 살아왔다.

  그런 나의 활동이 사회에서 인정을 받아 2004년, 2005년에 여러 언론에 보도되었다. 조선일보 People in 경기에 “한국 도자기의 전통 세계에 알려요”란 제목으로 소개가 된 것을 계기로 KBS WORLD 라디오, KBS1 TV “1분 제안 함께 가자! 대한민국” 문화홍보 등 매스 미디어를 통해 일본 출신으로 우리 나라 문화를 홍보한다는 보도가 많이 되었다.

  지금까지 내가 걸어 온 길은 참으로 멀고도 험한 길이었지만, 나는 “한국과 일본의 가교 역할을 하겠다”는 당초의 내 꿈과 목표가 이루어가고 있는 중이며 앞으로도 한국과 일본간의 우호증진에 열정을 가지고 작은 힘이라도 보탤 수 있어서 행복하고 감사하게 생각한다.

  ‘88년에 국제결혼을 하고 ‘98년에 한국 국적으로 귀화한 후, 결혼 21년째가 되는 2009년에 가장 한국스러운 이름인 “나현지(羅泫祉)”로 개명을 하게 되었다. 이제 한국사회에서 기슴을 펴고 자랑스러운 한국인으로서 당당하게 살고 싶다. 나는 내 조국 대한민국을 많이 사랑하는 자랑스러운 한국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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